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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천 경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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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용 없이 지낸 지 얼추 네 해가 간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반은퇴했으니 그리 바쁠 일도 없었고 나이 들며 함께 커진 차 덩치도 어느 순간 눈에 거슬렸다. 게다가 기름값을 대는 일도 점점 만만치 않았다. 입으론 생태경제를 말하며 거리낌없이 차를 몰고 있는 몰염치에 대한 반성도 한몫했을 거다.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의 정정불안으로 석유가격이 고공행진 중이다. 이에 모든 경제주체는 석유가격이 얼마나 오를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만큼 현대는 석유 의존적이다. 현대는 석유로 세운 성이다. 그러나 이 성은 본질적으로 허약할 수밖에 없다. 석유의 유한성 때문이다. 유한성으로 그 가격은 끝없는 상승 압력을 받는다. 높아진 가격은 다시 경제를 주축으로 한 현대문명의 발목을 잡는다. 2008년의 경제위기를 분석해보면 그 뒤엔 금융의 난맥상과 함께 석유가격의 폭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도 계속되는 이 위기는 석유가 현대문명에 보내는 조기경보이다. 석유의 유한성은 변할 수 없는 진리다. 석유는 끊임없이 그 고갈을 경고한다. 그런데도 인간은 그것을 듣지 못한다. 가격 폭등이란 현상만을 앵무새처럼 되뇔 뿐이다. 석유 고갈은 현실이 될 것이며 이는 곧 현대문명의 종말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너무 평온하다. 불편한 진실에 대한 외면은 인간의 본성인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 현대과학이 그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할 거라 철석같이 믿고 있다. 근거 없는 낙관론이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휘발유에 붙는 세금 인하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국민은 거리낌없이 세금을 낮추자고 요구한다. 국가는 또 그것을 심각하게 고려한다. 어이없다. 석유가격이 오르는 이유와 석유 고갈에 대비한 진지한 성찰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자원이 유한할수록 인간의 탐욕은 극심해진다. 석유는 유한자원이자 재생불능자원이다. 그렇다면 아껴야 하는 게 당연한데도 인간은 오히려 파괴적 소비에 탐닉한다. 자동차는 이 파괴적 소비의 주범이다. 자동차는 대표적인 지위재이자 과시적 소비의 꽃이다. 이젠 중산층까지 끼어들어 너도나도 큰 차를 몬다. ‘너만 타냐, 나도 탄다. 너만 쓰냐, 나도 쓴다’는 파괴적 소비가 현대의 자동차 문명을 대표한다. 너도나도 휩쓸리는 이 파괴적 소비의 끝은 뻔하다. 오늘의 일본을 보면 석유 고갈이 가져올 미래의 참상을 충분히 그려볼 수 있다. 고갈이 아니라 일시적 공급 부족의 상황일 뿐인데도 일본의 혼란은 극심하다. 이젠 파괴적 소비의 함정에서 벗어나야 할 때다. 유한한 자원에 의지한 문명이 마냥 성장할 순 없다. 고갈과 오염은 우리가 줄여야 할 목표다. 이를 위해 징벌적 세금체계를 강화해야 한다. 자본과 노동의 부가가치에 집중된 기존의 세금체계를 자원 고갈과 오염원에 방점을 두고 바꿔나가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자원 고갈과 오염의 주범인 휘발유 소비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정당하다. 지구의 자원은 우리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 후대의 것이기도 하다. 언제까지 그들 몫을 가로채며 살 것인가. 하물며 석유는 재생불능자원이다. 이제 더는 그들 몫에 손을 대면 안 된다. 당장 소비를 줄여야 한다. 자발적 동참을 마냥 기대할 수 없으니 세금을 통한 강력한 억제책은 어쩔 수 없다. 거둔 세금은 미래의 에너지원 개발에 쓰면 될 일이다. 이 정도는 해야 그나마 후손에게 덜 미안하지 않겠는가.
마포역 깊은 계단을 올라 지상에 서면 한강물에 부딪힌 햇살이 천지를 휘감으며 내 눈마저 감긴다. 이제 비로소 겨울의 한복판을 내달려온 강바람 속의 봄 내음을 느낄 수 있다. 감동은 언제나 눈을 감아야 제 맛이다. 가던 걸음 잠깐 멈추고 바람과 햇살을 느낄 수 있는 이 새삼스런 자유가 차를 버림으로써 내가 얻은 소소한 행복이다. 윤석천 경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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