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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3.25 19:25 수정 : 2011.03.25 19:25

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

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

한국 대중음악사의 절창으로 평가받을 만한 노래 중에 <주여 이제는 여기에>가 있다. 유신 시절 김지하 시에 지사적 음유가객 김민기가 곡을 붙였는데, 비장한 가사와 곡조가 절망적 상황 속에서 삶의 희망과 구원을 희구하는 인간의 염원을 담고 있다. 기독교적인 신앙에만 국한하지 않고 인간의 보편적 정서를 담고 있어서, 숙연함을 느끼게 하는 곡이다. 권력자들의 미쁨을 살 리 없어 금지곡이 되었다. 그 후 이 노래는 “주여 이제는 그곳에”라는 제목 아래 반공주의적 내용으로 개사되어 불리게 되었다. ‘지금 이곳’의 상황에 대한 절절한 자기성찰 없이 ‘그곳이 문제이니 그곳을 구원해 달라’고 하는 새 가사는 생뚱맞고 어색했다.

3월11일 일본 동북부에 대지진과 해일이 일어났을 때 한국 대형 교회의 몇몇 목사가 이를 일본인들의 비기독교적 경향과 결부시키는 발언을 하여 인터넷이 들끓었다. ‘노이즈 마케팅’으로 여기고 무시해버릴 수도 있었겠지만, 천박한 자기만족에 겨워 측은지심마저 잊어버린 냉혹한 마음이 뭇사람의 공분을 산 것이다. 그에 비하면 자신들이 겪었던 참혹한 경험에 대한 한과 분노를 내려놓고 가해자의 나라인 일본의 재난과 고통을 위로하는 집회를 연 정신대 할머니들이야말로 거룩함의 참모습을 보여주신 분들이었다.

대지진에 따라 일어난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사고가 체르노빌 사고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는 일각의 지적이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설마’ 했다. 체르노빌 참사는 노후시설 관리 소홀로 인한 사고 발생에다, 엉성한 대응으로 인해 참화가 극대화된 경우이기 때문이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체르노빌 사태 25주년에 즈음하여 <핵과학자 협회지> 3, 4월호에 기고한 “체르노빌 후 25년: 많은 교훈을 배우다”라는 글에 따르면 사고는 4월26일 아침(새벽 한시 반)에 시작되었는데, 방사능 누출과 인명 피해에 대한 첫 공식 보고는 4월27일 아침에야 있었다. 정부의 대응도 그만큼 늦어졌음은 물론이다. 사태는 바깥으로는 은폐될 뻔했지만 4월28일, 스웨덴에서 허용치 이상의 방사능이 검출됨으로써 전세계에 알려졌다.

일본 정부는 사실 그렇게 경직되거나 무책임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초췌해진 얼굴로 사고 관련 정보와 대책, 정부 입장을 전하려 애쓰는 에다노 유키오 관방장관의 모습은 감동까지 주었다. 현장에서 사투를 벌이는 도쿄전력 직원들의 희생적 활동도 체르노빌 때와는 다르리라는 희망을 낳았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문제는 심각해지고 있다. 현장 직원들의 ‘방사능 피폭 입원’ 기사가 나오면서 사태의 끝이 어디일까 다들 불안해한다. 원자력 발전의 근본적 문제에 대한 논의와 별도로,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이번 사고로 인한 토양과 바닷물, 공기의 방사능 오염이 큰 관심사일 것이다. 점심 식사를 함께 하던 지인들은 방사능이 어디에서 어떤 원인으로 유출되고 있는지 모른다는 말을 주고받으며 한국이라고 안전할 수 없음을 우려하였다.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이 방사능 피해를 더는 입지 않기를 바람과 아울러, 한국에도 공기, 바닷물, 식품을 통해 방사능이 전파될 가능성이 있으면 이에 대처할 방법을 숙지하고자 한다. 진눈깨비 날씨 속에서 눈비에 젖은 자신의 몸과 옷이 안전할까 불안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 번 발생하면 핵전쟁 이상의 재앙을 초래하는 원전 사고를 인류는 이미 여러 차례 겪었다. 적어도 동아시아 지역 차원에서라도 재난과 그 위험성에 대한 상세한 정보의 공유와 공동 대처를 위한 방안이 마련되어야 한다. 다시 한 번 저 노래 가사를 빌리자면, 우리는 “주여, 이제는 그곳에”가 아니라, “주여, 이제는 여기에, 우리 모두와 함께”라고 간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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