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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4.19 20:02 수정 : 2011.04.19 20:02

김별아 소설가


방사능에 오염된 하늘에도, 죄 없는 소와 돼지가 생매장된 땅에도, 봄은 온다. 오고야 만다. 그리하여 분노와 슬픔을 다독이려는 듯 꽃이 핀다. 별꽃처럼 피어 난분분하다.

그 황홀한 꽃 잔치에 취해 양손에 주렁주렁 쓰레기봉투를 든 채로 아파트 안 공원 벤치에 걸터앉았다. 햇살이 눈부시다. 젊은 다산(茶山)이 마음 맞는 벗들과 결성한 ‘죽란시사’(竹欄詩社)처럼 꽃이 피었으니 한번 모이자고 소식이나 띄워볼까? 이런저런 객쩍은 생각을 하다가 재활용품 수거일을 맞아 쓰레기 분리 작업에 바쁜 청소부 아줌마 아저씨들께 눈길이 닿았다.

새로 이사한 아파트는 1000호가 넘는 대단지라 경비와 청소를 담당하는 용역업체가 분리되어 있다. 첨단의 방범 시스템을 자랑하는 경비업체 직원들이 나름의 젊은 전문가라면 청소업체 직원들은 날삯을 받고 일하는 늙숙한 품팔이꾼이다. 깡통과 플라스틱을 분리하고 종이상자를 정리하는 청소부들의 얼굴에는 고단한 노동의 흔적이 주름살로 자글자글하다. 뜨거운 봄볕에 아저씨들은 아예 웃통을 벗고 하얀 ‘난닝구’ 바람으로 일하는데, 그중 한 분의 팔뚝에 뭔가 글자 같은 게 아른아른 눈에 띄었다.

누가 소설쟁이 아니랄까봐 본능적으로 머릿속에 지금의 곤궁한 삶과 대비되는 아저씨의 화려한 옛날에 대한 상상이 좌르륵 펼쳐졌다. 혹시 아저씨가 은퇴한 조폭이라면 팔뚝에 새겨진 문신은 ‘차카게 살자!’가 아닐까? 평생토록 잊을 수 없는 사랑의 낙인처럼 ‘미숙이’나 ‘혜영이’ 같은 연인의 이름을 새긴 것은 아닐까? 그런데 도저히 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 쓰레기봉투를 버리는 척 곁눈으로 훔쳐보니 세월에 빛이 바래 푸르뎅뎅한 그 문신의 글귀는… ‘추억’이었다. 추억. 벤치로 다시 돌아와 한참 동안 꽃비 아래서 그 말을 곱씹었다. 아저씨가 힘겹게 무거운 종이박스를 들어올릴 때마다 ‘추억’은 삐뚤거렸다. 나는 퀴퀴한 쓰레기 냄새가 풍기는 빈손을 홈켜쥐었다. 우리는 어떤 추억의 힘으로 살고 있는 것일까?

얼마 전 작곡가 류형선을 비롯한 음악인들이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와 통일맞이의 제작 후원을 받아 10년 만에 재발매한 고 문익환 목사 헌정앨범 <뜨거운 마음> 한 장을 선물 받았다. 음악에는 문외한인지라 이러니저러니 평가할 처지는 아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앨범을 듣노라니 가슴이 싸해지며 그야말로 문익환 선생에 대한 ‘추억’이 물밀어 들었다.

나는 그를 목사나 시인, 혹은 통일운동가로 추억하지 않는다. 역사의 평가와 세상의 평판에 상관없이 추억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기에, 나는 20여년 전 대학 신입생 시절에 우연히 마주쳤던 모습으로 선생을 추억한다. 거리는 뜨거웠고 구호는 넘쳐흘렀고 ‘적’은 완강했던 시절인지라, 그날 서울 대학로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집회의 정확한 명칭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집회 장소가 원천봉쇄되는 바람에 서울대 의과대학 교문 앞에서 약식집회를 벌이던 중 사복경찰이 연좌했던 시위대를 덮쳤다. 그리고 쇠파이프에 쫓겨 동지가 동지를 밀고 밟고 도망치는 아수라장에서 한 여학생이 사복경찰에게 잡혀 쓰러진 채 구타당하기 시작했다. 마치 정지화면처럼 아직도 눈에 선한 그 장면에, 문득 문익환 선생이 등장한다. 백발이 성성한 그가, 솔직히 말하자면 감상주의와 온정주의는 배격해야 한답시고 때로 흰 눈으로 바라보았던 목사이자 시인이, 마구잡이로 두들겨 맞는 여학생을 감싸고 사복경찰의 발길질을 대신 받는다. 죄 많은 세상을 대신해 주먹 ‘세례’를 받는다.

그 추억이 없었다면 “사랑을 가져라. 사랑은 지치지 않는다!”는 문익환 선생의 일갈이 지금까지 나를 흔들지 못할 것이다. 추억 속에서 그는 감상적이고 온정적인 운동가가 아니라 감성적인 시인이자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목사, 무엇보다 뜨거운 마음을 가진 인간이므로.

생살에 바늘을 찔러 물감을 넣어 새길 만큼 간절한 추억을 가진 이는 진정으로 복되다. 늦봄에 늦봄을 추억하며, 내 헐벗은 팔뚝을 가만히 쓸어본다.


김별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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