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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5.09 19:57 수정 : 2011.05.09 19:57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지난번 ‘세상읽기’ 이후 한 청년의 지적은 너무도 아팠다.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인 카이스트 학생들이 연속하여 자살하고 있는데, 그동안 청년과 교육과 공공성과 미래 희망에 대해 말해온 대학 교사로서 왜 아무 말이 없느냐는 매운 비판이었다.

존재의 본질과 관련하여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자기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는 분야는 단연 종교·교육·언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에게서 낮고 억눌리고 소외된 삶들을 위로하고 가르치고 보듬어 두루 고르게 높이라는 본령은 찾기 어렵다.

오늘의 한국 종교가 과연 우리네, 특히 궁핍한 영혼들의 평안과 공동체의 평화에 기여하고 있는가? 대답은 반대이다. 종교로 인한 영혼 방황과 내부 쟁투, 사회평화 파괴는 이제 사회를 구성하는 어떤 영역 못지않게 해악적이다. 고작 ‘개인들에게’ 면죄부를 팔았다는 이유로 폭풍 같은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음을 고려할 때, 신도의 숫자와 교회 면적을 계산하여 ‘하느님의 것’인 ‘교회를 통째로’ 사고파는 암담한 현실은 종교인 영혼의 집단화형 차원을 넘는 종교혁명으로도 부족한 지경이 되고 말았다. 세상 구원과 영혼 대속은 고사하고, 사회보다 종교가 더 타락하였기 때문이다. 누가 누굴 걱정하고 구원한다는 말인가?

언론이 공동체의 공기이고 사회 전체의 불편부당한 대변자요 전령이라는 원론은 이미 무너진 지 오래다. 그들은 대립하는 이익과 목소리의 한편에 서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가능하면 더 크고 더 세고 더 지배적인 목소리를 대변해오고 있다. 그렇지 못한 자들이 “우리 얘기도 함께 들어달라”고 하소연할 곳은 대체 어디인가?

우리 교육 문제를 상징하는 카이스트 학생들의 자살 문제의 본질은 ‘카이스트 학생들조차’ 연속 자살한다는 데에 있다. 잘났건 못났건 인간의 모든 죽음은 동일하게 슬프고 절절하다. 자살은 더욱 그러하다. 이 말은 이미 카이스트 이전에 수많은 대학생들이, 그리고 중고생들이 ‘매년’ ‘세계 최고 수준으로’ ‘계속’ 자살을 해왔음에도 왜 지금처럼 절박하게 대면하지 않았느냐는 물음이다. 카이스트 학생들에 앞선 숱한 학생 자살들에 대해 우리는 하나하나를 정녕 다시 돌아보고 교육의 본령과 방략을 전면 혁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게다가 이제는 ‘모든 공부경쟁에서 이겨온’ 카이스트 학생들조차 연속 자살하고 있다. 만약 이 최고 두뇌들조차 낮은 학점이나 징벌적 등록금제 때문에 자살하였다면, 그것이야말로 이들에게 입시 점수와 학과 성적을 넘어 삶의 진정한 성공이 무엇인지, 무엇과 경쟁하여 누굴 위해 이기는 것이 참 승리인지를 가르치지 않아, 나약한 성적주의자들을 양산해온 우리 교육의 총체적 실패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들과 대화하였다면, 모든 고통은 반드시 끝이 있으며 지금의 (입학) 성공 역시 지극히 과정적이며 부분적이라고 말해주었을 것이다. 지금의 고통을 이겨내야 진정한 인생 경쟁에서 성공할 수 있으며, 또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모든 ‘공적’ 삶들은 바로 극한적인 ‘개인’ 고통들을 극복한 결과였다고. 그런 후에 자신이 아니라 남을 위해 산 사람들이었다고. 즉 삶의 진정한 의미는 본원적으로 이타적인 것이며, 남을 위해 미래에 살려고 준비할 때에 우리는 자살충동을 포함해 모든 개인적 고통을 극복할 참된 가치를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고.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의미는, 사회구조와 나의 삶이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를 넘어 나의 비전과 준비로 더 좋은 사회가 가능하고, 특별히 내가 능력있는 좋은 영혼을 가지면 가질수록 나 하나 먹고사는 문제를 넘어 더 많은 사람들을 먹여살릴 수 있으며, 끝내는 모두를 위한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우리의 교육·종교·언론이 타인, 특별히 낮고 병들고 지친 사람들을 위한 비전·가치·정책들을 칭송할 때에, 그를 위해 살았던 삶들이야말로 진정 거인이었다고 말해줄 때에 오늘의 청년들은 그 꿈을 향해 이 고통스런 현실을 이겨나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고통의 크기와 꿈·영혼·비전의 크기는 비례하기 때문이다. 기성세대의 무지와 몽매로 인한 젊은 죽음들 앞에 진정 깊은 사과와 조의의 마음을 표한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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