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05.13 20:21
수정 : 2011.05.1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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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천 경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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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추 오십을 넘긴 시골 출신이라면 대부분 경험했을 거다. 배고픔. 너나없이 가난했던 그 시절, 배고픔은 일상이었다. 그게 불과 몇십년 전이다. 흐른 세월은 과거를 부정한다. 배고픔의 기억은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얘기일 뿐이다. 이젠 밥풀 흘렸다고 욕먹지 않는다. 오히려 떨어진 밥풀을 주워 먹으면 혼난다. 풍요와 배부름이 당연한 세상이다. 어느덧 빈곤과 배고픔은 내놓기 쑥스러운 주제가 되어버렸다. 남의 일일 뿐이다.
그래도 좋은 걸까. 여전히 지구촌은 배고프다. 한국도 배고픔을 완전히 떨쳐버린 건 아니다. 한반도로 범위를 넓히면 처참하기까지 하다.
올해 초 식량 문제가 화두가 된 적이 있다. 그땐 모두가 식량위기를 말했다. 참 떠들썩했다. 하나 그도 잠시, 세상은 이내 조용해졌다. 그새 국제 곡물가격은 슬금슬금 올라 우리 식탁 물가를 위협하고 있다. 라면에서 과자까지 오르지 않은 게 없다. 사람들은 분노한다. 그릇된 환율정책, 시기를 놓친 금리정책, 기업들의 이기적 이윤추구, 미국의 폭력적 양적완화 정책 등을 들먹이며 비난에 열을 올린다. 모두 일리 있다. 그런데 전부 남 탓이다. 내 탓, 우리 탓은 없다.
식사나 술자리 직후, 식탁을 유심히 살펴본 적이 있는가. 대개 남겨진 음식물로 질펀하기 마련이다. 왕왕 먹은 양보다 남겨진 양이 더 많은 경우도 있다. 이렇게 남겨진 음식물은 쓰레기일 뿐이다. 과잉 소비다. 우리는 잊고 산다. 우리에겐 쓰레기에 불과한 이 음식물을 얻기 위해 오늘도 지구촌 누군가는 피를 흘리고 있다는 걸. 오늘도 10억명의 사람이 고픈 배를 움켜쥐고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는 걸. 그런데도 우린 오늘도 넘치게 차려 남기고 버린다. 이게 지구촌 식량위기의 한 원인이다. 우리도 원인제공자다.
물론 과잉소비는 식량·식탁물가 위기의 종범에 불과하다. 주범은 따로 있다. 바로 곡물의 엉뚱한 전용이다. 지구촌에서 수확되는 곡물의 상당량이 육류와 연료 생산에 전용된다. 미국에서 수확되는 옥수수의 3분의 1이 에탄올 생산에 쓰인다. 고기를 얻기 위해 가축사료로 쓰이는 곡물도 만만치 않다. 한 단위의 고기를 얻기 위해선 그 몇 배의 곡물이 투입되어야 한다. 우리 식탁에 오르는 고기는 농축된 곡물 덩어리이다.
이러니 식량위기가 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과잉소비와 곡물의 전용이 식량위기를 상시화하고 있다. 이게 식량위기의 본질이다. 설상가상 지구촌의 기후변화 양태도 심상치 않다. 토양은 점점 오염되고 있고 대수층은 나날이 고갈되고 있다. 게다가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2060년이 되면 지구촌 인구가 100억명을 돌파할 거란 전망이다. 무서운 일이다.
지구촌 전체가 해답을 찾아내야만 한다. 그 전에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즉시 시작해야 한다. 곡물의 에탄올 전용을 개인이 막아내기는 힘들다. 하나 먹거리 소비는 얼마든지 줄일 수 있다. 적당히 먹고 적게 버리면 된다. 사소한 일처럼 보이지만 이게 세상을 바꾸는 단초가 될 수 있다. 이건 물가 상승을 억제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도 의미가 있다. 자발적 소비 억제야말로 힘없는 소비자가 자본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무기다. 터무니없이 비싼 과자와 라면은 아예 사 먹지 않으면 된다. 그래야 자본의 횡포도 줄어들 것이다.
한 번 두툼해진 뱃살은 빼기 힘들다. 그래도 빼야 한다. 그러자니 시간과 돈이 든다. 이게 무슨 낭비란 말인가. 애초 넘치게 먹지 않으면 될 일이다. 절집의 승려가 되자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때론 흐드러지게 먹고 마실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가끔이어도 좋을 일이다. 매일이 마냥 풍요로운 축제일 수는 없다. 약간의 허기에서 오는 절제의 행복이 포만감에서 오는 그것보다 결코 덜하지 않다. 이게 나 자신과 지구를 사랑하는 길이다.
윤석천 경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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