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06.23 19:10
수정 : 2011.06.23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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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대 <디앤디포커스>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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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속구만 구사하는 투수가
경기를 망치곤 한다
서해 민항기 사격 사건이 그렇다
1999년의 제1연평해전은 머뭇거리던 북한 경비정을 우리 고속정이 신속하게 제압한 해전이었다. 반대로 2002년의 제2연평해전은 머뭇거리던 우리 경비정을 북한이 기습해 우리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힌 해전이었다. 이후 서북해역에서는 누가 먼저 군사행동을 하느냐가 전투의 승패를 결정하는 결정적 요인으로 인식되었다. 이명박 정부 들어와서 해군의 교전수칙을 5단계에서 3단계로 변경한 것은 바로 군사행동의 ‘속도’를 높이겠다는 취지다. 이러한 시간개념의 변화는 2009년 대청해전에서 남쪽의 신속하고 과감한 작전으로 구체화되었다.
대청해전 이후 북한이 서해에서 취한 조처는 ‘시간개념을 근원적으로 바꾼다’는 것이다. 2010년 2월 북한군 전체를 총괄하는 김격식 총참모장이 해주 일대를 관할하는 4군단장으로 부임했다. 일부 언론에서는 그의 자리이동을 ‘강등’이라고 했지만 사실이 아니다. 이 파격적 조처는 서해 북한군이 평양의 지침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현지에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빠른 지휘체계가 출현했음을 의미한다. 신속한 군사적 결정을 책임질 수 있는 최고위급 책임자가 현장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로 말하면 합참의장이 백령도 현지에서 지휘를 하는 것과 같다.
연평도 사건을 겪고 나서 이명박 정부는 북한에 비해 작전 속도가 뒤처진다는 데 당혹감을 갖게 되었다. 김관진 국방장관은 “상황이 발생하면 먼저 대응하고 나중에 보고하라”는 ‘선조처 후보고’를 강조했다. 작전의 속도를 높이라고 군을 독려하면서 ‘전투형 군대’를 표방했다. 그리고 올해 6월에는 북의 4군단에 대응하는 서북도서방위사령부를 발족시켰다. 3성 장군의 지휘 아래 서해에서 지·해·공 합동작전을 수행하겠다는 뜻이다. 바야흐로 서해에서 결전을 준비하는 남과 북의 ‘속도경쟁’이 극단을 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의 군은 강속구만 구사하는, 구질이 단순한 투수들과 같다. 적절한 체인지업으로 상대방의 타이밍을 관리하는 똑똑한 투수가 아니다. 이런 투수들이 경기를 망치듯이 섬과 바다에서 잘못된 관리로 위기가 발생한 사례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미국의 남북전쟁, 베트남전쟁, 쿠바 미사일 위기, 포클랜드전쟁, 페르시아만의 여러 위기들이 바로 그것이다. 중국과 베트남 사이의 난사군도 분쟁은 미-중 위기로 곧바로 이어질 수 있다. 서해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 가능성이 지난 18일 새벽 민항기에 대한 사격 사건에서 드러났다. 중요한 것은 합리적인 위기관리 능력이다.
군은 궁색하게 민항기가 항로를 이탈해 북한 공군기로 오인했다고 말하지만, 설령 항로를 벗어난 비행기라 하더라도 이렇게 사격하란 법은 없다. 우리 군은 한반도 공역에 비행중인 어떤 비행기라도 식별이 가능하며 24시간 감시하고 있다. 만약 북의 전투기가 침범했다면 공군은 자동으로 출격하여 작전절차대로 대응한다. 이런 일체의 절차를 거치지 않고 경계병이 사격한 ‘빠른 조처’는 이제 서해에서의 속도경쟁이 군사대비의 합리성이 침해되는 위험한 수준으로 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규정 속도’를 위반한 전투원들에게는 사격통제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브레이크가 풀린 아주 위험한 상황이다. 감속장치가 없는 군대는 더 큰 위기에 대한 초대장이다.
내년 3월의 핵안보정상회의에 50개국 정상이 인천공항으로 들어올 예정이다. 공항에 총부리가 겨누어져 있다는 사실이 외국에 알려지면 이 찜찜한 공항에 외국 정상이 들어오고 싶을까? 용감한 군인들에게 위기관리를 맡기고 정부는 국제회의만 잘 준비하면 과연 모든 문제가 풀릴까? 군대가 준수해야 할 원칙과 절차, 위기를 관리할 줄 아는 정부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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