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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7.10 19:21 수정 : 2011.07.10 19:21

안병진 경희사이버대 미국학과 교수

희망버스는 단순히 주변부로 몰린
노동자 인권 지원 투쟁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민주공화국 운동이다

칼럼 마감 시간 때문에 일찍 현장에서 나와 버렸다. 하지만 가슴이 너무 아프고 부끄러워 차마 글을 못 쓰고 한 시간째 먼 곳만 보고 있다. 그곳은 천민자본의 일방적 정리해고에 맞서 186일째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김진숙님이 계신 85호 크레인의 방향이다. 그녀에게 따뜻한 위로 한마디는커녕 아예 입구에서 경찰의 차단벽에 가로막혀 돌아선 것이 너무도 가슴 아프다. 그녀는 35m 고공에서 처절한 삶을 이어가고 쌍용 해고 노동자는 퉁퉁 부은 발로 연대를 위해 수백㎞를 걸어왔는데 겨우 몇 시간 걸은 발을 불편해 내려다보는 나의 뻔뻔함이 참 부끄럽다.

하지만 나를 가장 부끄럽게 하는 것은 한동안 나는 삶의 뿌리로부터 절연된 지식인 상태로 살아왔다는 사실이다. 김진숙의 용접노동에서부터 케이티엑스(KTX) 노동자들의 감정노동과 농민들의 수확노동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우리 삶의 모든 뿌리가 천민자본에 의해 위협받고 흔들리고 있는데 난 그저 눈을 감아왔다. 악수를 청하는 백기완 선생님의 눈을 차마 마주치지 못하면서 나의 가족은 부산의 김진숙님을 향해 가는 희망버스에 올랐다. 이는 곧 우리 가족의 삶의 뿌리에 다시 접속하고자 하는 여행의 시작이다.

이번 희망버스는 단순히 주변부로 몰린 노동자의 인권을 위한 지원 투쟁이 아니다. 더 본질적으로는 우리 모두의 삶의 뿌리와 정의를 회복하기 위한 민주공화국의 운동이다. 민주공화국이란 우리 모두의 자유롭고 품위 있는 삶의 공간 그 자체이기에 그 뿌리인 노동이 중심 어젠다가 되어야 한다.

그간 민주당과 같은 중도 자유주의 진영은 때로는 역량의 부족 때문에, 때로는 노동하는 이들의 주변화가 마치 21세기 트렌드인 것 같은 무지와 착각 속에서 자신들의 삶의 뿌리를 훼손해 왔다. 이제 삶의 뿌리와 정의의 복원을 위한 노동과 자유주의의 전면적 결합은 2012년 선거의 핵심적 화두가 되어야 한다. 정치통합 운동도, 전당대회도 이 핵심 이슈의 관점과 고공 크레인의 현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진보적 정치세력들에게도 희망버스는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부산으로 내려가는 희망버스 안 ‘정치학 강의’에서 김세균 교수님은 시민들의 자발적 운동으로 태동한 이 희망버스 운동은 21세기 연대운동의 새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했다. 내가 탄 희망버스에는 87년 민중후보였던 백기완 할아버지부터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인 96년생 중학생까지 포함되었다. 그리고 진보적 정당 운동의 김세균 교수님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위해 헌신해온 노혜경 시인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이 포함되었다. 이 다양한 흐름의 접속은 전통적 노동운동에는 창조적이고 발랄한 자극을 주고 반대로 중간층과 신세대 운동에는 깊은 무게감을 부여해준다.

리 호이나키란 미국의 실천적 지식인은 평생의 화두를 삶의 뿌리와 연결된 지식으로 삼았다. 그의 아름다운 삶의 여행 궤적을 다룬 책의 제목은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이다. 사실 정의란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의 세련된 책과 강의실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의란 비틀거리며 삶의 현장과 뿌리를 찾아 나선 길에서 더 선명한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오늘도 김진숙님은 35m 고공 크레인에서 강풍에 비틀거리며 정의와 인간에 대한 예의를 절규하고 있다. 서구에서는 21세기 자본주의의 미래는 장인 노동자에게 있다고 하는데 도대체 이 나라는 장인에 대한 예우는커녕 인간 이하로 대접하고 있다. 이제 그녀와 정리해고 노동자들을 흔들리는 고공과 거리에서 다시 삶의 단단한 현장으로 보내야 한다. 대신에 대한민국 모두가 비틀거리며 정의의 길을 찾을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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