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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7.17 19:11 수정 : 2011.07.17 19:11

박상훈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

선관위가 지배하는 선거체제는
하층의 정치참여 기회를 빼앗아
당장 개선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 정치를 연구하러 온 외국인 교수를 만났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선거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러던 중 그는 한국의 경우 선거운동 기간이 너무 짧고 규제가 지나치게 많다며, 이런 일은 싱가포르에나 비견될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어쩌다 보니 한국 민주주의가 경제적으로 부유하나 그 대가로 권위주의 정치를 인내하고 있는 나라와 비교되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선거관리위원회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선관위가 다른 민주주의 국가들처럼 단순히 선거와 관련된 사무만 본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산이다. 민주화 이후 지금까지 국가기구 가운데 예산과 인원이 가장 많이 늘어난 대표적인 조직이 선관위다. 조직만 커진 게 아니라 권한도 막강해졌다. 그동안 정치와 관련된 제도가 이렇게 저렇게 바뀌는 데 가장 핵심적인 구실을 했다. 정당과 정치인, 나아가서는 시민사회단체들의 발언과 행동에 대해 경고조처를 남발하며 규제해왔다. 이제는 시민 대상의 민주주의 교육까지 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선관위의 권능이 강력해짐에 따라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과도한 규제로 사실상 선거운동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는 점이다. 일반 대중이 정치와 만날 수 있는 기회와 공간도 선거 부정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며 크게 줄였다. 과도한 정치활동 규제와 대중 참여를 불온시한 것의 결과는 투표율의 급락으로 나타났다. 민주화 이후 20년 동안 30% 가까이 떨어졌는데,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이처럼 빠른 시간에 이처럼 빨리 투표율이 떨어진 사례는 찾기 힘들다. 그냥 하락한 것도 문제인데 부자 동네에 비해 가난한 동네의 투표율이 더 급격히 낮아졌다. 과도한 선거 규제가 낳은 이런 계층 편향적인 결과만큼 한국 민주주의를 우울하게 만드는 것도 없다. 혹자는 그래도 강력한 선관위의 규제 덕분에 선거 부정과 부패가 많이 줄지 않았느냐고 반론할지도 모르겠다. 그 점에서도 난 생각이 다른데, 무엇보다도 돈의 필요성이 결코 줄어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권자 대중과의 접촉을 막을수록 여론조사와 새로운 광고기법 등 기술집약적이고 자본집약적인 수단에 대한 의존은 급격히 높아졌다. 가난한 후보들과 그를 돕고자 하는 사람들이 몸으로 뛰어 선거운동 할 기회만 뺏고 말았을 뿐, 큰돈 드는 선거는 더 깊이 구조화되고 있는 것이다. 불법의 한계를 최대로 확장해놓은 정치자금법도 같은 결과를 가져왔다. 무엇보다도 돈 없는 후보들의 출마를 배제하는 효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을 통한 정치자금 기부도 금지되었고, 사회 하층의 유권자들이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과 후보를 돕기 위해 돈을 모을 때도 두려움을 느낄 정도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경제적인 여유가 있거나 남의 돈이라도 동원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만 정치할 수 있는 신종 금권정치 시대로 들어서게 되었다.

인간이 만든 어떤 사회제도도 어느 하나의 원리에 의해서만 계도될 수는 없을 것이다. 예컨대 시장경제가 자본주의적 원리에 의해서만 운용된다면 인간사회의 공동체적 기반은 심각한 위험에 처할 것이다. 민주정치 역시 마찬가지다. 권력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므로 합리적인 규제나 제약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그것이 자치(self-rule)라고 하는 일차적 운영원리를 위협할 정도가 되어서는 곤란하지 않을까 한다. 민주주의를 잘하게 하면서 선거 부정과 부패가 줄어들게 해야지 부정과 부패를 없애겠다며 민주주의를 없앨 수는 없는 일이다. 선관위가 지배하는 한국의 선거체제는 균형을 잃었고 그 폐해가 지나치게 계층 편향적이어서 개선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게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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