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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7.18 19:12 수정 : 2011.07.18 19:12

윤석천 경제평론가

어느새 대중은 한명의 영웅을 위한
다수의 희생과 패배를 받아들인다
승자에 대한 보상이 과하진 않나?

포털 대문에 걸린 뉴스를 읽는다. 아이돌 가수 얘기다. 저작권료 수입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란다. 이번 유에스(US) 여자오픈 골프대회에서 우승한 선수 소식도 있다. 20대 초반의 그녀가 받은 상금이 6억원을 넘는다. 후원사 보상금까지 합하면 10억원 가까이를 한방에 벌었다. 그 아래 자살 소식이 있다. 20대, 고졸 출신 여자다. 자격증만 4개, 살려 애쓴 흔적일 거다. 그런 그녀가 지하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게 오늘의 대한민국이다.

어린 아이돌 스타들이 수십, 수백억짜리 빌딩을 사는 세상이다. 스물을 갓 넘긴 스포츠 스타들도 일년에 수십억을 번다. 이게 가당한 일인가.

그래도 이 정도는 참을 수 있다. 하나 재벌과 그 자식, 손자들 소식엔 울화통이 터진다. 배당액만 수백억이다. 주식 평가액은 상상 초월이다. 이게 정상일까. 누구도 의문을 표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은 그들을 칭송하는 데 바쁘다. 신파로 가득한 영웅전을 쓴다. 불굴의 의지, 각고의 노력, 피가 마르는 인고의 시간, 긍정 또 긍정. 지치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 메뉴다. 이렇게 영웅이 탄생한다.

몇십년을 뼈가 휘는 노동을 해도 집 한 채 마련하지 못하는 이들이 태반이다. 근 이십년을 공부하고도 변변한 일자리 하나 구하지 못하는 시절이다. 다시 몇년을 엉덩이가 짓무르도록 공부해도 박봉의 공무원 되기도 힘든 세상이다. 이들의 분투가 승자의 그것보다 덜하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우리도 열심히 산다.

그럼에도 보상이 이처럼 불평등한 이유는 뭘까? 그 뒤에 자본이 있다. 자본은 대중을 현혹해 승자를 영웅으로 만든다. 목적은 이미 승자인 그 스스로 영웅이 되기 위해서다. 영웅 반열에 오르면 모든 죄는 사라진다. 돈을 벌기 위해 저질렀던 수많은 탈법과 파렴치함도 정당화된다. 승자가 곧 영웅이 되는 세상이 이들이 꾸는 꿈이다. 자본은 이를 노리고 소수의 선택받은 승자를 영웅으로 만든다. 그러곤 끊임없이 이들을 자신과 일체화시킨다.

이제 다수의 패배를 정당화시키면 된다. 이를 위해 자본은 인간 내면에 숨은 약육강식의 동물 본능을 깨운다. 세상을 로마의 검투장으로 만든다. 패배자는 피를 흘리며 죽어나가야 한다. 승자가 모든 걸 차지해야 한다. 이등도 희석돼야 한다. 그 수단이 일등 몰아주기이다. 일등과 이등의 차이는 엄청나야 한다. 그래야 극적으로 영웅이 탄생한다. 어느새 대중은 한명의 영웅을 위한 다수의 희생과 패배를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승자에 대한 존경과 보상이 너무 과하다 생각하진 않는가? 그래 좋다. 그들의 노력, 재능은 얼마든지 수긍할 수 있다. 자본이 그들에게 주는 돈이 과하긴 하다만 자기 돈을 주는 거니 딴죽을 걸 수도 없다. 유쾌하진 않지만 어쩔 수 없다. 다만, 승자의 몫과 그를 위한 다수의 희생을 당연시해서는 안 된다. 우리 대부분은 그들 못지않게 최선을 다해 산다. 물론 재능은 부족하다. 인정한다. 그렇지만 그게 이토록 심한 불평등의 빌미가 돼서는 안 된다. 억울하다. 자본과 승자들의 몫이 온전히 그들만의 것은 아니다. 그들의 오늘을 만들어준 건 결국 우리 민초들이기 때문이다.

부가 균형을 이뤄야 건강한 세상이다. 이제 그 방법을 고민해야 할 때다. 공평을 기하는 최선의 방법은 뭘까. 불균형을 원천봉쇄할 수는 없다. 방법은 세금혁명뿐이다. 많이 벌면 많이 내도록 해야 한다. 침을 흘리며 마냥 승자를 부러워할 일이 아니다. 경배의 잔을 올릴 때가 아니다.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의 세상을 ‘조금 더 가진 자’와 ‘조금 덜 가진 자’의 세상으로 바꿔야 한다. 이제 그 꿈을 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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