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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7.28 18:57 수정 : 2011.07.28 18:57

김여진 배우

기업과 사회가 치워버린 사람들,
아무리 눈 감고 귀 막아 봐야
그들은 어디로도 가지 않는다

요즘 나는 두 개의 창을 통해 세상을 본다. 매스미디어의 창과 소셜네트워크의 창. 이 두 창이 보여주는 세상의 모습이 조금씩 그 차이를 더해가고 있다.

소셜네트워크의 창에는 매일매일 억울하고 힘겹게 사는 사람들, 싸우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긴다. 삶의 터전을 잃고 쫓겨나는 서울 명동 카페 ‘마리’의 사람들, 안 그래도 하루하루 살아가기 퍽퍽했을 포이동 판자촌 사람들이 그 집마저 화염에 잃고 우는 사연들, 그리고 절대 매스미디어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트위터상에는 매일 올라오는 ‘용역’이라는 이름의 청부 폭력단체 같은 행태. 어떤 날은 정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만 보지 않으면, 매스미디어만의 세상에서 아무 문제 없이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만 같다.

한 가족이 아이 낳고 기르고, 집 장만하고, 아이 대학 보내고, 결혼시키고, 그때까지 회사에서 잘리지 않고, 살아가는 데 별문제만 없다면, 그래 굳이 다른 사람의 아픔 같은 거 돌아보지 않고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게 잘 안된다. 매스미디어엔 없고 소셜네트워크엔 있는 것, 정리해고되고 재개발에 밀려나는 사람들이 어디로도 정리되어 치워지지 않은 채 그 자리에서 소리 내어 울고 있고 얘기하고 있다.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있고, 뭐든 해보려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김진숙’이 있었다.

그녀가 85호 크레인 35m 상공에서, 양말을 빨아 널면 꽁꽁 얼어 머리를 때리는 흉기가 되어버리는 겨울과 크레인 철판 위에서 상추와 방울토마토가 익어가는 봄을 지내며, 고 김주익 열사가 살다 가신 142일을 훌쩍 넘길 때까지 대부분의 매스미디어는 그녀를 비추지 않았다. 그녀의 이야기와 웃음과 눈물이 소셜네트워크의 망을 타고 사람들의 가슴을 흔들었을 때, 그녀를 전혀 알지 못한 많은 사람들 눈에 ‘희망버스’는 분명 난데없는 소란으로 비쳤을지도 모르겠다. 200일이 넘어가도록, 프랑스·영국·미국의 신문들이 다 놀라워하며 다루는 그녀의 이야기를 어쩌면 우리가 제일 모를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왜 거기 그렇게 있는지, ‘정리해고 철회’에 왜 그토록 목숨을 걸고 있는지.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러니까 자신들이 나름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이름을 붙인다. ‘외부세력’이라고, ‘거짓 선동’이라고. 그러나 아무리 그 사람들을 그렇게 치부하고 싶어도 그 사람들의 실체가 변하지는 않는다. ‘해고하기 쉬워서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거부하는 이 땅의 부모들, 출구가 보이지 않는 깜깜한 미래가 자신의 잘못만은 아님을 알아버린 청춘들이 그녀가 존경스럽고 그리워서 나선 거였다. 세계에서 가장 급속히 경제인구가 감소하고 기업이 빠져나가는 부산을 여태 방치한 허남식 부산시장님은 노사간에 알아서 잘 대화하도록 외부세력은 빠져달라고 거듭 말하고 있다. 노사간의 대화라니. 그야말로 김진숙씨도, 희망버스를 타려는 사람들도 바라는 바다. 사람이 저렇게 매달려 있는데 국민이 부른 청문회에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는 회장, 그들에게 제발 말해주면 좋겠다. 대화 좀 하라고. 이미 당신들의 회사에서 세 목숨이나 잃지 않았느냐고, 온 국민이 그녀의 숨소리까지 듣고 보는 이 시대에 그렇게 피하고 폭력으로 막는다고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말이다.

지금의 매스미디어가 비춰주지 않는 세상, 아픈 사람들, 기업과 사회가 치워버린 사람들, 그들과 그들의 문제는 사라지지 않는다. 아무리 눈 감고 귀 막아 봐야 그들은 어디로도 가지 않는다. 그 자리에서 계속 가쁜 숨을 쉬며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또 나 자신이며 우리 아이들의 미래이기도 하다. 그러니 제발, ‘대화’해 주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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