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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8.29 19:23 수정 : 2011.08.29 19:23

윤석천 경제평론가

낮은 계층일수록 친사회적이다
부자 등 성공한 사람일수록
고립적·이기적 성향을 보인다

상류층, 자칭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눈물이 너무 잦다. 대통령이 찔끔거리더니 너도나도 줄줄이다. 재벌부터 고위 공직자에 이르기까지 눈물 흘리는 게 유행이다. 참으로 감수성이 충만한 대한민국이다. 없던 눈물샘을 어디서 빌려 오기라도 한 걸까. 용산참사를 비롯한 이 땅의 수많은 주검 앞에서도 의연하지 않았던가. 이들의 느닷없는 눈물이 뜨악하다.

누구를 위한 눈물일까. 타인을 향한 연민·애정은 아닌 것 같다. 애초 부유한 사람들은 공감능력이 부족하다. 타인의 아픔에 무감각하다. 이기적이다. 단순한 억측이 아니다.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의 심리학자인 대커 켈트너 교수의 연구 결과이다.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낮은 계층의 사람일수록 공감능력이 뛰어나며 친사회적이다. 물론 동정심도 더 많다. 이에 반해 부자 등 성공한 사람일수록 고립적·이기적 성향을 보인다. 배움이 짧을수록 ‘공감 정확도’가 더 높았다. 저학력자가 고학력자보다 오히려 타인의 생각과 감정을 잘 읽어냈다.

왜 이런 결과가 나온 걸까? 켈트너 교수는 인간의 생존욕구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부자와 달리 가난한 사람은 생존을 위해 타인에게 의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읽어내야 한다. 눈치가 빨라야 한다. 공감능력을 키워야 한다. 결국 친사회적이 될 수밖에 없다. 반면 부자들은 타인의 마음을 읽고 공감해야 할 이유가 없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도 얼마든지 잘 먹고 잘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부자가 되기 위한 전제조건이 탐욕적 이기심임을 알고 있다. 타인의 아픔에 둔감해야 유리하다는 것도 잘 안다.

이제야 이해가 간다. 기득권자들에겐 애들 밥 먹이는 게 왜 그토록 힘든 일이며 해고노동자를 다시 품는 게 왜 그리 어려운 일인지. 이미 그들의 유전자엔 공감능력이 상당히 퇴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공감하라 외쳐봐야 소용없다. 가난을 이해할 거란 생각도 오산이다. 설사 머리로는 이해한다 해도 가슴으로 공감하기는 어렵다. 세금 더 내려 하는 워런 버핏, 프랑스 부자들은 거의 돌연변이다.

현 정권의 서민 사랑은 끔찍했다. 출범하면서 내세운 게 적하주의 찬양이었다. 부자들이 더 많이 갖게 되면 그 돈이 폭포수처럼 위에서 아래로 흘러넘칠 거라 장담했다. 경제학의 대표적 거짓말이다. 자연법칙으론 물이 아래로 흐르듯 돈도 그래야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세상에선 다르다. 돈은 아래에서 위로, 위에서 위로 흘러 고일 뿐이다. 웬만해선 위에서 아래로 흐르지 않는다. 이제 비로소 거짓말이 드러나고 있다. 적하효과를 강조하며 4대강에 들어간 수십조원, 부자감세 수십조원은 지금 어디 있는가. 누구 주머니에 들어가 있는지는 애들도 안다. 서민에게 남은 건 빚뿐이다. 빚을 내어 부자들 뒤치다꺼리를 했을 뿐이다.

이걸 막을 방법은 없을까. 새삼스레 기득권자들에게 공감능력을 가르칠 수는 없다. 타인의 마음을 읽는 공감정확도 역시 마찬가지다. 배우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유일한 방법은 공감능력이 앞서는 서민이 연대하는 수밖에 없다. 기득권의 선의, 측은지심에 기댈 생각은 애초 버려야 한다. 자본은 노동에 기반함을 잊으면 안 된다. 우리의 노동이 그들의 자본을 살찌우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니 당당히 현재의 시스템을 바꾸자는 목소리를 내야 한다. 돈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지 않고 정체되어 있다면 흐르도록 시스템을 만들면 된다. 이번 무상급식 투표처럼 말이다. 기득권층만큼만 스스로의 이익에 치열하면 된다.

그들의 눈물은 자신을 향해 있을 뿐이다. 그 눈물에 속지만 않아도 세상은 분명 한 뼘 정도는 더 나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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