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09.01 18:58
수정 : 2011.09.01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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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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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보호위원회 위원님들,
뒷골목에서 담배 꼬나물고 있는
십대들에게 다가갈 용기 있는가
여성가족부 청소년보호위원회 심의에서 몇몇 노래를 청소년유해매체물로 선정했다고 한다. 술 마시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서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감기약도 안 된단다. 향정신성 의약품이기 때문이다. 먹는 것은 상관없는데 그것을 노래로 들으면 안 된다는 이 이상한 논리. 싸움에서 진 상대편 보스에게 똘마니들이 “이제부터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말하는 깡패 영화 장면이 떠오른다. 저는 안 읽으면서 아이들에게는 책 읽으라는 행태도 오버랩된다. 솔직히 말해보자. 그게 보호일까? 정말 아이들을 사랑하고 아껴서 나온 것일까? 보호란 최소한, 받는 사람이 그것을 느껴야 한다.
나는 요즘 노래 가사에 불만 있는 편이다. 툭하면 외롭고 힘들다고 징징댄다. 표현도 단순하고 문맥도 허술하다. 하지만 그것이 요즘 아이들 모습이다. 유행하는 노래는 언제나 당대의 압축이고 상징이기 때문. 중요한 것은 애들이 왜 이렇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청소년 때는 정서를 만드는 시기이다. 이때 만든 정서로 평생을 산다. 낯선 곳으로 여행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인문학과 예술을 배우고, 거기서 파생되는 것으로 친구들과 소통하는 나이이다. 인성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그 와중에 풀리지 않는 문제는 어른에게 물어본다. 어른이 할 일은 아이들이 물어올 때 대답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어른들의 특징은 물어오기도 전에 과도하게 알려주는 데 있다. 폭력적으로 길을 제시한다.
그 때문에 아이들은 입시지옥과 경쟁의 싸움터 속으로 들어가 있다. 경쟁과 시험은 친구를 밀어내는 행위이다. 다른 사람을 밟고 올라타야만 하는 구조이다. 이런 환경을 만들어 놓은 어른들은 대다수의 아이들이 별 의미 없이 교실에 잡혀 있는 모습을 보면서 흐뭇해한다. 그 애들이 어떤 심정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다. 알고 싶어 하지도 않고 알려줘도 이해 못한다. 대단한 윤리교사 나셨다. 모든 아이들이 착하게 입시와 시험에 열중한다고 해도 서울대 정원이 늘어나지도 않는데 말이다.
1970년대 박정희 시절에 금지곡 많이들 있었다. 조금만 찝찝하면 금지곡 때렸다. 건전한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금지 때린 사람들은 요정 가서 마담 끼고 놀았지만 말이다. 배호의 ‘0시의 이별’도 금지곡이었다. 밤 12시까지 남녀가 함께 있다니, 더군다나 통행금지 시간 아닌가, 뭐 이런 이유였다. 유치찬란하다.
국민들이 조금이라도 개길까봐 불안에 떠는 위정자들은 그래서 그들의 노래를 통제하려고 한다. 남발되는 통제와 금지는 그 사회의 생명력이 약해져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내가 북한의 미래를 암담하게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 노래 때문이다. 전 국민이 비슷한 내용의 가사를 똑같은 창법으로 부른다. 이미 노래로서의 기능은 죽은 것이다.
하나만 묻겠다. 청소년보호위원회 위원님들, 뒷골목에서 술에 취한 채 침 뱉으며 담배 꼬나물고 있는 십대들 만난다면 다가갈 용기 있는가? 한 대 얻어터질 각오를 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야기 들어보고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고민하고 진짜 보호해볼 생각 있는가? 그게 겁난다면 최소한 피시방에서 중학생들 게임하는 것 10분만 들어보시기 바란다. 나도 욕을 잘하는 사람이고 욕의 기능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편이지만 그들의 욕설을 듣고 있으면 머리가 돌 지경이다.
아이들은 그 지경에 가 있는데 유해물 여부를 1차 심의하는 음반심의위원회 강인중 위원장은 “문화예술 행위는 반드시 성경의 잣대로 심판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성경은 잘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문화예술의 발생과 파급에 대해서는 영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정말로 아이들이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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