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사건 때마다 우리의 대응은
책임자들의 면피성 호들갑으로
헛소동을 치르며 지나가는 듯하다
“내 유일한 장점은 위기 앞에 동요하지 않는다는 거야.”
함께하던 사람들이 협박에 흔들리며 저마다 불안감에 떠드는데 리더 격인 선배가 조용히 말했다. 혹독한 시절, 그라고 어찌 두려움이 없었을까마는 이 말에 기대어 모임은 평정심을 추스를 수 있었다. 세파 속에 어려울 때 그 말은 지금도 종종 힘이 되어준다.
송전 손실이 적고 전압이 안정적이어서 세계적으로 품질을 자랑하던 한국 전력산업이 여름도 다 지나가는데 난데없이 순환정전의 사고를 쳤다. 늦더위의 전력수요를 잘못 예측했다고 한다. 추석도 지났건만 웬 늦더위? 짜증을 내다가 그 덕분에 여름철 이상저온에 시달린 곡식들이 열심히 익어가고 과일이 영글어간대서 참아냈더니만.
한 국회의원은 트위터에 북한 소행이라고 올렸다가 뒤늦게 사과했다. 북한의 소행이든 외계인의 침공이든 정전사태는 그에 준하는 대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천안함, 연평도에 이어 순환정전까지, 우리의 대응은 책임자들의 면피성 호들갑으로 헛소동을 치르며 지나가는 듯하다. 그러다가는 조만간 진짜 위기에 봉착하지 않을까.
높은 원전 의존도, 원가 이하의 전기요금과 수요관리 소홀 등 논란이 계속되지만 대체로 한국의 전력산업은 공급(발전)능력에서나 급전(송배전)기능에서는 세계적으로 그 안정성을 신뢰받아 왔는데 어쩌다가 이런 망신살이 뻗쳤을까.
대통령은 “당신들은 잘 먹고 잘산다고 전기를 마구 끊느냐”고 질타했다. 한 야당 의원은 대통령을 향해 “대국민 사과는 안 하고 한전에 가서 화풀이나 했다”고 지적했다가 여당 의원들의 야유를 받았다. 인터넷에서 한 논객은 작금의 전력산업에 만연한 낙하산 인사를 빗대어 “국가 경영을 ‘곗돈 모임’으로 아는 정부가 사태의 원인”이라고 힐난하였다.
돌이켜보면 외환위기 이후 지난 10여년 전력산업을 민영화하고 경쟁을 도입한다면서 한전을 쪼개어 6개 발전사를 분리시키고 전력거래소를 만들어 인위적인 시장거래를 하면서 한국의 전력산업이 얻은 것이 과연 무엇일까.
구조개편 이후 발전회사 간 경쟁은 비용절감을 위한 정비기간 단축, 급전대기 회피 등 공급안정성을 위협해 왔다. 발전회사, 한전, 전력거래소 간에 전력운영 정보가 공유되지 못하면서 유기적인 협조체제가 작동하지 못하여 이번과 같이 유사시 대응능력 부실로 나타났다.
온갖 구조개편 용역으로 외국 컨설팅회사에 나간 돈만 수백억원에 이르고, 쪼개놓은 조직에 낙하산 임원만 늘어났을 뿐 전력계통의 조정능력은 이런 어처구니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지난 10여년 구조개편 논의에 지친 전력산업이 이제 진짜 위기로 들어서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전력은 산업과 문화를 틀짓고 돌아가게 하는 국가의 동맥이라는데, 위기 앞에 동요하지 않는 지도력, 의젓하게 사태를 관장하는 지도력은 국민들의 평정심이 만들어내는 것일 게다. 헛소동에 휩쓸리지 않고 차제에 전력인프라를 되돌아볼 때다. 십대 청소년들의 행사장에 무차별 총질이 벌어진 충격 속에서, 그러나 그럴수록 관용의 가치를 신봉한다며 손에 손에 장미꽃을 들고 장례식으로 향하는 노르웨이의 장미, 지진해일의 불행 속에서도 사재기를 자제하며 가족의 죽음 앞에 조용히 흘리는 일본인들의 눈물, 장면은 달라도 월드컵 응원의 열기 속에서 경기가 끝나자 승패에 관계없이 저마다 쓰레기를 주워담던 한국 붉은 악마들의 추억. 단편적인 스케치지만 결국 대형 사건 앞에서 종종 ‘국민’이라고 통칭되는 그 사회 주된 트렌드가 어떻게 형성되느냐가 역사를 이어가는 줄기인 듯싶다. 위기를 극복해 가는 ‘국민’들의 평정심, 천안함과 연평도의 충격 속에서도 결국은 그 트렌드가 대한민국을 여기까지 버텨왔으리라. 김윤자 한신대 국제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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