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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익 서울대 교수·한국미래발전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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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다쳐 타게 된 휠체어는
걸리버의 난파선이 되어
나를 새로운 나라로 데려갔다
나는 어려서 폴리오(척수성 소아마비)를 앓았다. 오른 다리를 좀 전다. 그렇다고 생활이 크게 불편하지는 않다. 말하자면 사이비 장애인이다.
10여년 전에 계단을 내려오다 넘어져 왼쪽 종아리뼈를 부러뜨린 적이 있었다. 두 다리가 다 불편해져서 두어 달 휠체어를 타야 했다. 그러자 휠체어는 걸리버의 난파선이 되어 나를 새로운 나라로 데려갔다.
강의실에 갈 수가 없었다. 내가 일하는 의과대학은 학생이 많아서 강의실이 웬만한 극장 같다. 출입문은 뒤에 있다. 네 명이 붙어서 휠체어를 가마처럼 들고 교단까지 내려가야 할 판이었다. 후배 교수들이 대신 강의를 해주었다.
화장실에 갈 수가 없었다. 장애인 화장실이 없는 건물이 대부분이고, 있다 해도 못 쓰는 곳이 많았다. 플라스틱 소변통을 싣고 다니다가 차 속에서 해결했다.
음식점에 갈 수가 없었다. 음식점은 지하에도 있고 위층에도 있다. 그런데 승강기까지 갈 수가 없었다. 길가에 있는 음식점들에도 반드시 높은 문턱이 있었다. 한 뼘도 안 되는 것이었지만 절벽이었다. 맛있는 집에 가는 것이 아니라 ‘들어갈 수 있는’ 집에 가게 되었다.
건물의 문들이 좁아서 휠체어가 통과할 수 없었다. 복도가 휘어지는 모퉁이를 지나지 못하는 일도 많았다. 제사가 있어서 형님댁을 갔는데 승강기는 중간층에 있었다. 계단에 주저앉아 반 층을 기어 올라갔다. 형님은 “우리 아파트가 좋은 곳인 줄 알았는데 너를 보니 아니다”라며 미안해하셨다.
자동차 길은 건널 수가 없었다. 4차선 도로라면 위태롭게 가고 6차선·8차선 도로라면 아예 불가능했다. 못 믿겠으면 휠체어를 타고 서울 테헤란로를 건너보시라. 보도는 더 심했다. 보도블록은 울퉁불퉁 패어 있고, 차도로 가는 턱은 높고, 보도가 아예 없는 곳도 많았다. 장애인용 경사로는 너무 급해 오르내릴 엄두가 안 났다. 평소에는 가볍게 지나가던 곳곳에 장애물이 있었다.
외국에 살 때는 그렇게 많이 돌아다니던 휠체어며 유모차가 왜 우리나라에서는 보이지 않는지 알았다. 장애인이 없어서가 아니다. 밖에 나와 돌아다닐 수가 없어서 장애인이 안 보이는 것이다. 그들은 어디 있을까? 어두운 방구석에, 장애인들의 나라에 있다.
만일에 내가 병을 좀더 심하게 앓아서 두 다리를 모두 못 쓰게 되었더라면 나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나는 전라도 어느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살았다. 그래도 초등학교·중학교는 다녔을 것이다. 그러나 도회지로 가야 하는 고등학교는 엄청 힘들었을 것이다. 더구나 대학은? 선친께서는 나를 꼭 가르치고 싶어하셨을 것이고, 그러면 남모르게 쌓인 거대한 빚더미 위에 앉아 계셨을 것이다. 한국에서 장애인으로 살아가려면 지금도 엄청난 돈이 든다. 하물며 반세기 전에야. 아버지가 빚조차 질 능력이 없으셨다면 나는 무엇을 하며 살았을까? 그래서 알았다. 나보다 더 나은 재주를 가지고도 교육을 못 받고 일도 못 하고 방안에만 박혀 있는 수많은 장애인들이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나라가 기회를 주었더라면 나보다 훨씬 훌륭한 사람이 되었으리라는 것을. ‘병신자식’을 둔 가난한 부모들이 얼마나 가슴을 치며 사는지 눈물겨운 사연도 짐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걸리버처럼 소인국을 잠시 다녀왔다 한들 그 아픈 사정을 내가 어찌 다 알겠는가? 그 후로도 나는 종종 넘어져서 한두 주씩 걷지 못하는 일이 생긴다. 그러면 다시 잠깐씩 장애인 나라에 들렀다 온다. 마치 추석날 시골집에 다녀오듯이. ‘도가니’ 같은 장애인 나라에서 영원히 출국금지가 되어 있는 그 나라의 국민들을 만나고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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