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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승 카이스트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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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영화제를 직접 체험하며
‘닫힌’ 학회들을 떠올려보았다
언제까지 교수들만의 잔치로…
얼마 전 부산국제영화제(BIFF)에 다녀왔다. 과학자가 들려주는 얘기가 영화인들에게 어떤 유익이 될까 걱정을 하며 찾았지만, 관객들의 따뜻한 반응에 깊은 감동을 받고 돌아왔다. 나를 초대한 곳은 ‘아시아영화정책포럼’이란 학술대회였는데, 각국 영화제작팀들이 아시아 다른 나라에서 영화를 찍는 환경을 좀더 편하게 하기 위한 정책 지원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이 자리엔 최근 ‘도가니 열풍’의 주인공 공지영 작가도 참석했는데, 다양한 시각에서 얘기를 나누는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성공적일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영화계 밖 사람들에게도 문을 열어두었기 때문이다. 시네마 투게더, 정책포럼 등 다양한 기획을 통해 이방인들은 ‘영화’라는 끈으로 부산에 모여 영화 얘기를 하고, 이런 따뜻한 인연이 이내 관심과 애정이 되어 부산국제영화제의 저력이 되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학자들이 참석하는 대규모 학술대회인 미국 신경과학회 연례모임에는 유명인사들이 초대된다. 영화 <슈퍼맨>의 주인공이었던 크리스토퍼 리브는 승마를 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척수손상을 입어 휠체어에 의지하는 신세가 됐다. 그는 학회에서 ‘나 같은 척수손상 환자를 위해 신경과학자들이 연구를 해달라’고 호소했고, 덕분에 척수손상 연구비가 크게 증액됐다. 또 영화 <백 투 더 퓨처>로 유명한 마이클 제이 폭스는 29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파킨슨병을 앓아 손을 떨게 됐으며, 그래서 ‘주머니에 손을 넣고 껄렁하게 연기하는 캐릭터’를 갖게 됐다며 파킨슨병 환자들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 학회에선 티베트 불교의 달라이 라마가 명상 상태의 뇌를 연구해 달라고 호소했고, 건축가 프랭크 게리는 건축물이 뇌에 미치는 영향이 궁금하다며 신경과학자들의 연구를 촉구했다. 이들 덕분에 신경과학은 더욱 다양하고 유연한 연구주제를 갖게 됐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우리나라에서 매년 벌어지는 학회들을 떠올려 보았다. 한국의 학회들은 대부분 재정적으로 넉넉지 못하다. 주로 회원들이 내는 회비로 운영되며, 학생 회원이나 비회원 등록비는 비싸지 않기 때문에 늘 열악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의학회들은 제약회사의 후원을 받아 풍족하게 치러지는 편이지만, 순수과학이나 공학기술 쪽에선 기업 후원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대학원생들이나 젊은 연구자들을 지적으로 자극할 만한 강연이나 행사가 많지 않다. 우리 분야 출신의 탁월한 최고경영자(CEO), 다른 분야로 넘어갔거나 다른 분야에서 우리 분야로 넘어온 융합형 학자, 젊은 연구자들에게 탁월한 통찰력을 제시할 각계의 지도자들. 젊은이들은 이런 사람들을 만나고 석학의 향기를 맡고 싶어한다. 학회가 ‘교수들만의 잔치’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자면 학회에 대한 기업의 따뜻한 후원이 절실하다. 기업은 이름을 알리기 위한 홍보성 후원이 아니라, 과학기술, 인문사회 분야에 깊은 애정을 갖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사명감을 갖고 지원해 주었으면 한다.
정책적으로는 학회 연회비를 연구비로 집행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래야 학회가 연회비를 높여 장기적으로 의미있는 행사를 기획할 수 있다. 이제는 ‘부작용 타령’ 때문에 학회가 제 기능을 회복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되풀이돼선 안 된다.
끝으로, 학회 운영자들이 젊은 연구자들을 위한 창의적인 행사를 기획해 주었으면 한다. 학회 밖에 있는 사람들도 찾고 싶은 학회, 그들을 기꺼이 초청하는 학회, 이런 열린 학회가 열린 인재를 길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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