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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10.20 19:11 수정 : 2011.10.20 19:11

김여진 연기자

선거철 여기저기서 들리는
“약자를 돌보겠습니다”라는 말,
그 말을 털끝만큼도 못 믿겠다

작년 봄 시골 작은 집에서 심각한 지적 장애를 가진 서른명의 아이들을 키우신 목사님 한 분을 만나 뵌 적이 있다. 청년 시절 15년을 결핵 환자와 함께 지내고, 이후 부모로부터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목사의 신분을 갖게 되었던 그분이 일러주신 팁을 전하려 한다. 연말에라도 장애인 시설 찾아가 주는 건 좋다. 일년에 한번도 안 가는 것보단 낫다. 과자 같은 거 사가지는 마라. 한꺼번에 많은 양의 인스턴트음식을 먹은 아이들은 반드시 배앓이를 한다. 그냥 돈을 줘라. 필요한 건 그곳 사람들이 제일 잘 안다. 더 좋은 건 생색 안 내고 매달 얼마씩 꼬박꼬박 돕는 거다. 예산을 짜서 운영할 수 있게 해줘라. 그리고 제발 같이 사진 찍자고 하지 마라. 와준 손님 기분 상할까 거절할 순 없지만 생각해보라. 당신 같으면 사진 찍고 싶겠는가? 아침에 얼굴 좀 붓고, 입은 옷 맘에 들지 않아도 사진 찍기 싫지 않더냐. 그런데 그 모습으로 그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예쁘고 잘난 당신 옆에서 사진 찍고 싶겠는가 말이다. 말하는 내내 일상적이고 차분한 어조로 웃으며 말씀하셨지만 듣는 내내 마음이 뜨끔거렸다. 정말 얼마나 적게 내놓고 얼마나 많이 생색내며 살고 있나 싶었다.

최근에 다시 마음이 뜨끔거린다. 선거철이라 그런지 마치 구호처럼 여기저기서 들리는 “약자를 돌보겠습니다”라는 말 때문이다. 약자란 무엇인가? 약한 사람, 돌봐주어야 하는 사람. 돈이 있거나 힘이 있는 부모를 만나 기껏해야 ‘입시경쟁’에서 살아남았다고, 취업경쟁이나 고시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했다고 해서 ‘강자’인가? 사회적 쓸모로 따져보면, 그러니까 없어서는 안 되는 순서로 따져보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약자’이다. 타인의 노동에 의해 먹고 입고 있는 거다. 깨끗한 곳에 몸을 누일 수 있는 거다. 여름, 수해가 있던 날 어느 아파트 지하에서 배전관리를 담당하다 죽어간 경비원보다 더 쓸모 있는 사람, 더 강한 사람이라 말할 수 있는가 말이다. 그래서 ‘사회적 약자’란 표현을 쓰곤 한다.

우리가 사는 사회의 계약 속에서 부당하게 소외되고, 자신의 노동이 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해서 궂은일, 힘든 일을 하면서도 어렵게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 아주 많다. 혹 내가 그렇지는 않다고 해서 안심할 일도 아니다. 지금의 안전망 정도의 수준이라면 눈 깜짝할 사이 그런 처지가 될 수 있다. 만일 내가 힘이나 돈을 좀더 가지고 있다면, ‘사회적 강자’의 위치에 있다면, 그분들께 가져야 하는 마음은 ‘측은지심’이 아니라 ‘빚 갚는 마음’이어야 할 거다. 하루라도 빨리 내가 누리고 지니고 있는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도록 애쓰는 마음. 낮은 곳을 돌보는 마음이 아니라, 내가 사실은 가장 낮고 보잘것없는 사람임을 깨닫는 마음일 거다. 흔히 공직자들에게 요구되는 ‘겸허’라는 덕목은 어쩌면 ‘너 자신을 알라’는, 너무도 당연한 명제일지 모르겠다. 명동에서, 포이동에서, 수십년 동안 그 자리에서 먹고살아온 사람들에게 새벽에 들이닥쳐 폭력을 휘두르는 그 청년들, 용역이라는 이름의 사내들, 그들을 고용한 회사, 그 엄연한 폭력을 눈감았던 관공서, 아무리 찾아가도 얼굴 한번 마주칠 수 없었던 그 지역 의원, 회사에서 성희롱을 당해 인권위에 진정했다는 이유로 해고당한 채 ‘여성가족부’ 앞에서 200일 가까이 농성하는 여성 노동자, 되레 쫓아내고 방해하려는 담당 부서 직원들…. 이제 와서 아무리 “약자를 돌보겠습니다”라고 노래를 불러봐야 그 말을 털끝만큼도 믿을 수 없는 건, 이미 그 말 속에 강고히 자리잡은 특권의식과 강자의 입장 때문만은 아니다.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몰염치한 현실의 그림들이 있다. 주어는 없다. 비단 한 사람의 문제도 아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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