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11.03 19:17
수정 : 2011.11.03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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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삼 경남 밀양 밀성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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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 담임을 한 지난 몇년 동안
아이들에게 ‘사기를 치고 있다’는
자괴감에 시달리곤 했다
나는 지금 고등학교 2학년 담임을 맡고 있다. 우리 학교의 관례대로라면 내년에는 이 아이들을 데리고 3학년으로 올라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하루에도 몇번씩 나는 이 상황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고3 담임을 한 지난 몇년 동안 나는 아이들에게 ‘사기를 치고 있다’는 자괴감에 시달렸다. 늦은 밤 거리에서 트럭 짐칸에 불을 켜놓고 딸기를 파는 졸업생 아이를 만난 적이 있다. 군 제대 후 복학한 첫 학기에 학교를 그만두었다고 한다.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아이다. 등록금은 지원되지만, 비전도 없고, 가르쳐주는 것도 없고, 삭막해서 견딜 수 없었노라고 했다. 회사 로고가 박힌 초록색 점퍼를 입고 네모난 공구가방을 들고 바삐 걷는 졸업생 여자아이를 만난 적이 있다. 여성들이 혼자 사는 주택에 인터넷과 유선방송을 연결해주는 일을 한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졸업시키면서도 기백만원씩이나 하는 지방 사립대학 등록금을 어떻게 댈까 걱정이 되었던 아이다. 휴일이나 방학 때 책이라도 보려고 시립도서관엘 가면 졸업생 아이들이 우르르 인사를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에 돌아와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온갖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거나, 몇십 대 일의 경쟁을 뚫어야 하는 각종 ‘고시’를 준비하는 아이들이다.
녀석들의 고3 시절이 생각난다. 너무 힘들어서 주저앉고 싶다는 아이에게 내가 던진 위로란 ‘조금만 더 참아보자’는 것이었다. 대학에 왜 가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고뇌하는 아이들도 ‘대학은 나와야지~’라는 통념 앞에 모두 무너졌다.
이 글을 읽고 있는 <한겨레> 독자들이 고3 담임이라면, 30명쯤 되는 학급 아이들에게 어떤 진학지도를 할 수 있을까? 국어와 국사를 좋아하는 아이에게는 70 대 1의 경쟁을 뚫어야 하는 9급 공무원 시험을 권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문학전집을 읽거나 드문드문 시집을 들춰보는 아이에게는 국어교육과를 권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임용고사 경쟁률은 30 대 1가량 된다. 영어를 잘하고 논리적 사고가 우수한 아이에게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으로 떼돈을 번다는 국제변호사를 권할 수 있을 것이다. 학과는 중요하지 않으니, 대학 다니는 동안 1억원쯤 모아서 로스쿨 시험 준비를 해보라고 권할 수도 있겠다.
지난 11월1일 청년 30명이 ‘대학 거부 선언’을 했다. 그들이 발표한 글과 인터뷰 기사를 출력해서 숨죽여 읽는다. 그러나 나는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이 기사들을 읽어보라고 권하지는 못하고 있다. 언젠가, 어느 반에서 속에 품고 있던 솔직한 이야기들을 한 시간 동안 떠든 적이 있다. 아이들의 얼굴에서 번져가는 표정들이 잊히지 않는다. 세계경제의 구조적인 장기불황과 공황의 가능성을, 석유고갈과 식량대란, 전쟁의 가능성도 어느 정도는 공감했을 것이다. 내가 전해준 오늘날 대학의 모습을 그들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시키는 대로 죽을힘을 다해 내달려온 아이들에게 출구가 없다는 나의 진단은 얼마나 가혹했을 것인가. 정규직 평생직장을 가진 내가 떠드는 실업과 비정규직의 나날, 그리고 그 반대편 대안적 삶과 보이콧의 아름다움이란 얼마나 공허했을 것인가. 그래서 나는 이야기하는 내내 뒷골이 뻐근하고 식은땀이 흘렀다.
우리가 지금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벌이는 이 모든 일이 실은 거대한 사기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가장 정직한 언어로써, 용기있는 행동으로써 드러내는 이들에게 눈물겨운 박수를 보낸다. 이들의 행동은 ‘눈 찢어진 아이’ 이야기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한국 사회의 가장 깊고 광대한 지층을 가로지르고 있다. 11월10일 수능 당일에는 수능을 거부하는 청소년들의 선언이 있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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