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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11.08 19:27 수정 : 2011.11.08 19:27

정재승 카이스트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폴리페서’라는 조롱도 있지만
정치적 견해를 용기있게 제시하는
지식인들이 존경스러울 뿐이다

언젠가 진중권 문화평론가가 사석에서 ‘학자와 논객의 차이’가 뭔지 아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의 말로는 논객은 사회적 이슈가 발생했을 때 제한된 정보와 급변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이 사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적절한 태도를 일러주고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통찰력을 제시하는 논객이 훌륭한 논객이리라.

반면 학자는 사건이 모두 종결된 뒤에 천천히 복기하는 사람이란다. 충분한 정보와 심지어 사태에 대한 대중의 반응까지도 모두 종료된 상황에서 이슈의 원인부터 결과, 사회적 함의까지 깊이있게 성찰하는 사람들이 학자라는 얘기다.

학자들이야 상황 종료 후에 복기를 하다보니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가 비교적 용이하고 사후 해석이라 안전하지만, 논객은 정보의 양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시시각각 상황이 바뀌며 사람들의 반응도 급변하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올바른 태도를 취하려면 ‘상식과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조언해 주었다.

이 얘기를 들으면서 우리 시대 지식인들의 역할이 바로 학자와 논객, 혹은 그 중간 어디쯤에 있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그것이 어찌 논객과 학자만의 문제이랴마는. 사회적 이슈가 터졌을 때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혼란의 상태에서 세상은 지성인들의 통찰력 있는 한마디를 갈구한다.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직접 보여준다면 더 근사한 지식인이리라.

상황이 종료된 뒤에 지나간 사회적 이슈를 반추해 보면서 우리의 행동을 성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미래에 더 나은 의사결정을 할 수 없다. 지식인이 사회를 성찰하고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면서 우리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견인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대학은 정치적으로 열린 공간이어야 한다. 학생들이 정치적 견해가 편향되지 않도록, 다양한 정보와 사상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열린 통로’가 존재해야 한다. 서로 다른 생각을 주고받고 설득하고 인정할 수 있는 ‘열띤 토론’이 가능해야 한다. 설령 가치전복적이고 사회적으로 불온한 생각이라고 해도 대학에서만큼은 용납되어야 한다.

이 당연한 얘기를 새삼 해야만 하는 것은 대학이란 곳이 ‘정치적으로 거세된 공간’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학교는 점점 보수화되고, 정부와 상업권력의 눈치를 본다. 세상은 대학생들을 취업 준비와 스펙 쌓기로 내몰고, 과도한 등록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 전선에 뛰도록 만들었다.

지식인들의 사회참여도 훨씬 더 격려해야 한다. 정치판을 기웃거리는 교수를 ‘폴리페서’라 조롱하지만, 정치적 견해를 용기있게 제시하고 정치적 행동에 적극적인 지식인들을 조롱해선 안 된다. 나처럼 그릇의 크기가 작아 엄두도 못 내는 사람들은 그들이 존경스러울 뿐이다.


예전에는 나 자신을 지식인으로 칭하는 것이 많이 공부한 티를 내는 것 같아서 낯부끄러웠다. 하지만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얼마나 비겁한 행동인지를 알 만큼 사회적 부채의식이 생겼다.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신뢰가 바닥에 떨어진 지금, 시민들은 스마트폰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무기 삼아 ‘한국판 재스민혁명’에 뛰어들 태세다. 기득권에게는 위험한 도발처럼 받아들여지겠지만, 시민들을 분노하게 만든 건 결국 그들이 아니었던가. 성찰만 하던 학자들까지도 행동하게 만든 ‘분노의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역사의식과 시대정신에 대한 통찰은 지식인의 전유물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숙명이다. 우리는 지금 ‘행동하는 지성’을 필요로 한다. 행동하는 지성을 길러낼 ‘가르침의 터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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