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11.16 19:13
수정 : 2011.11.16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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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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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30∼40년 뒤의 미국은
우리가 알아온 미국과는
다른 나라가 되어 있을 수도 있다
미국과 러시아는 상극이라고만 생각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미국은 이민자들이 시민권력에 바탕을 두고 만든 나라인 반면 러시아는 군주권력을 중심으로 영토를 확대해간 나라였고, 사회구성·체제·가치관에서 두 나라는 큰 차이가 있었다. 그럼에도 두 나라는 광대한 복합민족국가라는 것을 제외하고도 유사점이 많다. 세계사 속의 위치나 이에 대한 자기인식이라는 면에서 특히 그러하다.
우선, 19세기 말까지 스스로 세계의 중심이라 믿었던 유럽인들의 눈에는 미국도 러시아도 변방의 후진국이었다. 미국은 신생국으로서 고립주의를 표방하며 유럽과의 마찰을 피하는 데 주력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18세기 초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 정책 이래 유럽 열강의 일원으로 발을 내딛기는 했으나, 유럽세력은 러시아가 몽골제국 지배의 흔적을 간직한 아시아적 사회라고 보는 경향이 있었다. 미국과 러시아는 각기 노예제와 농노제라는 예속노동 제도를 유지해 오다가 거의 같은 시기에 이를 폐지했다. 러시아 농노제는 1861년 초 차르의 선언으로 철폐되었고, 미국 노예제는 1862년 말~1863년 초 링컨 대통령의 선언으로 철폐되었다. 두 나라에서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은 그 후의 일이다.
그런데 19세기 전반에 이미 이 두 변방국이 세계를 좌우할 초강국이 되리라 예견한 이가 있었다. 프랑스의 정치사상가 알렉시 드 토크빌은 <미국의 민주주의> 1권(1835)에서 러시아 국민과 미국민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이들의 출발점은 다르고 발전 경로도 상이하다. 그러나 두 나라는 섭리의 어떤 비밀스러운 요구에 의해 언젠가 자신의 수중에 이 세계 절반의 운명을 각각 장악하게 될 사명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토크빌의 예견은 20세기 후반 냉전체제로 실현되었다. 2차대전 후 미국과 소련(러시아가 주도하여 구성한 연방)이 양대 초강국으로서 국제질서를 양분하였다. 두 나라 사람들의 자존심도 극에 달하였다. 두 나라 국민은 각기 자국은 세계 역사에서 예외적 위치를 가졌다는 예외주의를 드러냈다. 러시아인들은 일찍이 자신들이 세계를 구한다는 러시아 메시아주의를 표방했고, 볼셰비키 혁명 후 이 경향은 더 굳어졌다. 소련의 공식 담론체계에서는 러시아 혁명이 세계사의 신기원이라고 해석했고, 체제비판적 지식인들도 상당수가 이 담론을 공유했다. 또 미국인들은 미국이야말로 지상에서 유일무이한 나라라 자처했다. 사실, 고도 산업국가 중 사회주의 정당이 발달하지 않은 유일한 나라라는 점에서도 미국은 예외적 국가가 아닌가라는 물음이 논자들의 머리를 싸매게 만들기도 했다.
두 나라 가운데 먼저 무너져 내린 것은 소련이었다. 미국은 그 후 유일 패권국이 될 것 같았지만, 지금 내부적·외부적으로 수많은 문제에 부딪히고 있다.
현재 러시아는 천연자원으로 국제적 영향력을 유지하려 하는 반면, 미국은 여전히 군사력으로 세계를 좌우하려 한다. 그러나 벌여놓은 전쟁도 수습하기 힘든 형편이다. 두 나라 모두 주류민족의 출산율 정체라는 문제에 직면해 있기도 하다. 미국은 소수민족들의 높은 출산율 덕분에 인구 자체는 증가하리라 보인다. 그러나 앞으로 30∼40년 뒤의 미국은 우리가 알아온 미국과는 다른 나라가 되어 있을 수도 있다. 문명의 전환이 세기의 전환과 나란히 진행된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두 나라는 21세기에도 여전히 대국으로서 지위를 유지하겠지만, 이제는 지구상의 어떤 나라가 두 대국 중 한 나라에 일방적으로 매달리는 것이 그리 유리하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
한국은 아시아에서의 세력균형을 위해 주변국 모두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되, 이 나라들의 변화에도 면밀한 시선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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