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12.08 19:10
수정 : 2011.12.08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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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진 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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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벌 금지로 교권이 추락했다고?
이미 바닥이었던 교권을 체벌로
감추고 있던 게 드러나는 건 아닐까
며칠 전 한 교실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기사를 봤다. 선생님과 학생 사이에 벌어진, “교권이 바닥에 떨어진 사건”이었다. 학생은 선생님께 있는 힘껏 대들고 비아냥거리고 있었다. 선생님은 “내가 널 때렸다고? 그게 때린 거야?”라고 묻고, 학생은 “얘들아, 니네 다 봤지? 선생님이 날 때린 거 맞지?”라고 다른 학생들의 동의를 구하고 있었다. 선생님이 “정말 한심하다”고 말하자, 한 치의 물러섬 없이 “선생님도요”라고 되받아친다. 선생님이 이 학생에게 아무리 화를 내고 소리쳐 봐도 이 학생은 점점 더 심하게 조롱하고 야유할 뿐이었다. 고백한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난 그 녀석을 쥐어팼을 거 같다. 기사 제목처럼 교권이 땅에 떨어져 자근자근 밟히는 느낌이었다.
한나절이 지나서야 내 사춘기가 떠올랐다. 선생님들에 대한 실망과 분노의 감정들. ‘미친개’라는 별명을 가진 선생님은 툭하면 맨손으로 가슴과 엉덩이를 때리는 성추행을 일삼았고, 공공연한 혐오의 대상이었다. 이런 극단적인 경우 외에도 학교는 늘 폭력으로 가르치는 곳이었다.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할 때, 실내화를 구겨 신었을 때, 자율학습시간에 늦게 착석했을 때…. 난 맞는 게 정말 싫었다.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게 정말 그렇게 맞을 일인가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반 친구가 다른 아픈 친구가 집에 가도록 택시를 잡아 태워준 뒤 자율학습시간에 늦게 들어와서 뺨을 대여섯 대 연거푸 맞는 걸 보고는 분해서 눈물이 났다. 소리 지르고, 욕하고 싶었다. 선생님을 존경해본 적은 정말 드물다. 그분들을 닮고 싶고 가르침을 따르고 싶다는 마음도 들지 않았다. 어린 마음에도 잘못된 건 잘못된 걸로 보였다. 단지 체벌이 무서워 꾹 참을 뿐이었다. 체벌은 권위를 지켜주지 않는다. ‘권위주의’라면 모르겠다.
아이들은 생각한다. 선생님이 옳고 내가 틀려서 벌을 받는 게 아니라고. 그저 선생님은 때릴 수 있는 위치에 있고, 나는 힘이 없어서 맞는 것뿐이라고. 이 역사가 하도 길어 이제 학내 체벌을 금지하려니 교권이 바닥에 떨어졌다는 한탄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사실은, 이미 바닥이었던 교권을 체벌로 감추고 있던 게 드러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오래전부터, 스승을 존경하고 따르는 풍토는 찾기 힘들었으니까. 오로지 입시만을 준비시키고 “이기는 사람이 옳다”고 주입시키는 학교에서 선생님의 권위가 인정되고 존경을 받기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런 근본적인 문제 말고도, 난 우리 선생님들이 ‘체벌’ 외에 아이들을 가르치고 설득할 수 있는 효과적인 ‘교육방법’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다. 비단 선생님뿐이 아니다. 사춘기 자녀를 둔 부모도, 청소년 문제를 떠안고 가야 하는 우리 사회 전체도 이 어려운 나이의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칠 방법을 갖고 있지 못하다고 느껴진다. 때리고, 겁주고, 다른 건 아예 못 보도록 ‘경쟁’ 속으로 밀어넣고, 금지하고, 금지하고, 금지하고….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들은 자란다. 바로 곁의 부모와 선생님, 인터넷과 방송매체를 보면서 어른들이 무엇에 탐닉하는지 다 본다. 돈이 최고라고, 잘난 사람이 못난 사람을 억누르는 게 옳다고 배운다. 이런 아이들을 때려 봤자 ‘폭력’을 배울 뿐이다. 구체적인 방법, 아니 기술이 필요하다. ‘어떻게 이야기 나눌 것인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렵다고 생각해 지레 포기해버린 ‘교육방법’. 뱃속에 아기를 품고 있자니 세상 무엇보다도 교육의 문제가 엄중하게 다가오는 요즘이다. 나를 통해 세상을 보는 이 아기가 드라마에서 나오는 대사를 따라할 것만 같다. “그래, 고작 폭력이란 말이냐?” 김여진 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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