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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12.11 19:18 수정 : 2011.12.11 19:18

안병진 경희사이버대 미국학과 교수

‘뿌리깊은 나무’의 정기준 체제냐
공화주의적 세종 체제의 선택이냐
내년에 우리는 결단해야 한다

드디어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 정기준 밀본 본원(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의 등장인물)이 오랜 막후정치에서 나와 무대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막 이들의 대담한 도전이 개시되었는데 어두운 앞날을 점치는 것은 너무 예의 없는 것은 아닐까 두렵다. 하지만 난 박근혜 전 대표라면 무조건 폄하하는 이들과 달리 2000년부터 언젠가 박근혜의 시대가 올 것을 예고하였고 <박근혜 현상>까지 공저를 했다. 단 그녀의 강점인 단단하고 단아하며 단순한(미니멀리즘) 정치는 바로 이 세 가지가 더 뛰어난 이에 의해 무너질 것이라는 단서를 가졌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현실과 방송 드라마에서 ‘세종 현상’으로 인해 이 ‘체제’가 무너져 내리는 시작을 보고 있다.

체제라고? 이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특정 개인이나 정당을 협소하게 지칭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 넓게는 보수와 진보 곳곳에 산재한 박근혜와 정기준의 귀족주의적 통치 패러다임을 말한다. 한국의 진보주의자 중 일부는 자신의 진정한 얼굴이 세종과 정기준 중 어디에 가까운지 깊이 자문했으면 좋겠다. 그런 점에서 얼마 전 이헌재 전 부총리와 최장집 교수께서 아직도 우리 내면에 어른거리는 박정희 체제의 그림자를 넘어 시민의 삶에 기초한 자유주의 가치의 재구성을 강조하신 것은 정말 탁견이 아닐 수 없다.

세종 현상의 의미는 세종과 정기준의 세기의 맞짱토론에 압축되어 있다. 이는 시민 네트워크 국가론 대 귀족주의 국가론의 대결이다. 만약 세종이 환생한다면 아마 페이스북의 주커버그를 영입하여 소셜네트워크에 기반한 민주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다. 이는 단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열심히 한다는 말이 아니라 소셜네트워크 혁명의 관점에서 정치와 경제, 그리고 교육 패러다임의 빅뱅을 주도함을 말한다. 반면에 오늘날 정기준이 환생한다면 시민 네트워크 혁명에 대한 불안감에 책임총리제나 책임정당정부와 같은 귀족주의적 대의제와 재벌 경제로 역동적 혁신을 저지하려 할 것이다. 다음은 자신이 세종과 정기준 중 누구 편인지를 가늠할 간단한 리트머스 테스트이다.

첫째, 세기의 토론에서 정기준은 자의적 ‘가카’에 대한 엘리트의 견제를 강조했다. 이에 세종은 코웃음을 치며 자의적 엘리트는 누가 견제하는가를 물어 정기준을 당황하게 했다. 세종은 마치 위대한 시민정치론자 마키아벨리처럼 깨어있는 시민의 견제력이 정치의 가장 핵심임을 간파한 것이다. 과연 자신은 시민의 견제력을 중심에 두는 보수나 진보인지, 아니면 자기들끼리의 정파 정당과 엘리트 정치를 만들고 있는지 자문해보라.

둘째, 정기준은 결국 세종의 분권은 어려운 책임을 나누려는 꼼수가 아닌가 질문한다. 하지만 바로 이 점이 정기준이 낡은 지점이다. 분권을 통한 민주적 소통과 일상적 시민의 집단지성 혁신은 물론 세종이 인정하듯이 부작용도 있지만 위대한 조선과 대한민국의 핵심 동력이다. 과연 자신은 분권 네트워크 정치와 시민 경제의 패러다임과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여전히 구름 위의 고고한 자기 생각과 엘리트 경제론 중심인지 자문해보라.

이 방송과 현실 드라마의 결말은 무엇일까? 내가 조선과 대한민국의 정기준이라면 세종 체제 형성과 맞서기보다 세종 이후 더 성숙한 공화주의적 군주제(오늘날은 민주공화국)를 위해 일단 세종 체제 구성에 힘을 보태겠다. 조선은 결국 이를 만드는 데 실패하고 퇴락해갔다. 내년과 내후년, 한국의 보수와 진보는 대혼돈의 부작용을 최소화하면서 역동적 민주공화국을 향한 세종 체제를 만들 것인지, 아니면 시대착오적으로 정기준 체제로 맞설 것인지를 결단해야 한다. 안병진 경희사이버대 미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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