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12.13 19:09
수정 : 2011.12.13 19:09
|
장귀연 경상대 사회과학연구원 연구교수
|
아무리 열심히 해봤자 남도 그러니
결과는 다시 운과 우연에 좌우된다
승리자의 비율은 이미 정해져 있다
언젠가 식당에 놓여 있는 신문을 우연히 읽고 있었다. 서평란이었다. 소개된 책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서평으로 보아 지금의 신자유주의에서 소수는 부를 쌓을 기회를 얻지만 다수의 사람들은 불안정한 일자리를 떠돌며 추락하는 삶을 버텨내기에 급급할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었다. 새삼스러운 건 아니다. 그런 내용의 책은 많이 나왔다. 그래서 그러려니 읽어내려갔다. 서평 필자는 젊은이들에게 권하면 좋을 책이라고 했다. 나는 다음에 당연히, 다함께 이를 바꿀 길을 찾아야 한다, 뭐 그런 얘기가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필자가 이 책을 젊은이들에게 권한 이유는, 조금만 삐끗해도 끝없이 추락하는 세상이니 젊은이들이 위기감을 갖고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계발할 동기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뒤통수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아, 이런 책을 읽고 이렇게 생각하는 방법도 있구나!
어쩌면 나의 ‘상식’이 상식이 아닐지도 모른다. 불안정과 빈곤이 만연할수록 많은 사람들이 그런 사회를 바꾸려 하기보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쳐야 함을 더 크게 느낄 수도 있다. 서평 필자가 권하지 않더라도 젊은이들은 이미 잘 알고 있다. 학교를 졸업하고 다수가 비정규직이 되는 현실을 잘 알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떨어뜨리더라도 나만은 그렇게 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하고 노력한다. 그러면서 그것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별로 의심하지 않는다. “어쨌든 노력해서 경쟁에서 승리하는 사람에게 많은 것이 주어지는 건 정당한 거 아니에요?” 나는 대꾸한다. “그럼, 학점 상대평가가 정당하다고 생각하니?”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대학생들 사이에서 상대평가 폐지운동이 있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으니까. 하지만 실제로 채점을 하고 상대평가를 해서 학점을 매기는 나는 그것이 정당하지 않다는 걸 안다.
A, B, C, D 각각 학점을 줄 수 있는 비율이 정해져 있다. 나는 중간고사, 기말고사, 리포트 채점까지 다 해놓고도, 이 학점을 매기는 데 또 하루를 소요한다. 비율에 따라 각 학점을 부여할 수 있는 학생 수를 계산한다. 동점자들이 나온다. 누구는 떨어뜨려야 한다. 시험지와 리포트들을 읽고 또 읽는다. 뭐든 비교해서 떨어뜨릴 정당성을 찾으려고. 아주 사소한 것, 논지와 상관없는 고유명사 하나를 틀려 떨어지기도 하고, 그때그때 내 기분에 좌우되기도 한다. 더 난감한 경우도 있다. 4학년 전공수업쯤 되면 학생들은 놀랄 만큼 성실해진다. 출석률 100%에 리포트도 성의가 가득하고 강의에서 한 말 하나 놓치지 않는다. 도대체 C학점 줄 학생도 없는데 어떻게 D학점까지 만들어내란 말이야? 그래도 억지로라도 만들어내야 한다.
경쟁이란 그런 거다. 운과 우연, 사소한 실수에 좌우되고, 내가 노력하면 남들도 노력한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봤자 남들도 그러니 다시 운과 우연에 좌우된다. 승리하는 사람의 비율은 이미 정해져 있으므로. 이것이 정당한가? 성실하게 노력하면 보답을 받고 버젓이 살아갈 수 있는 구조가 더 정당한 게 아닐까?
소수는 승리하여 많은 것을 얻지만 다수는 나락을 옆에 두고 불안정하게 기우뚱거려야 하는 세상. 이는 경쟁이라는 말로 정당화될 수 없다. 비록 이 신자유주의 시대, 경쟁이 만병통치약이자 유일무이한 원리처럼 얘기되고 있다 할지라도. 서평의 필자는 책을 읽고 젊은이들에게 더 노력할 마음을 다지라고 말하지만, 책이 밝히고 있듯 경쟁에서는 노력과 상관없이 승리자는 소수다.
그러니 학점 상대평가 폐지운동도 필요하지 않을까? 결코 성적 처리를 앞두고 내가 골치아파서 그러는 게 아니다.
장귀연 경상대 사회과학연구원 연구교수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