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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12.21 19:23 수정 : 2011.12.21 19:23

불확실성을 치러내는 시스템이
잘 작동한다면 불확실성은 오히려,
혹은 비로소 혁신의 계기일 수 있다

한 해를 돌아보며 감회에 젖는 연말, 기독교 신자가 아니어도 문득 들려오는 크리스마스 캐럴에 마음이 조금은 들뜨거나 혹은 고즈넉해지는 시간, 느닷없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사망 소식이 날아들었다.

“경영리스크 최고조”, “바이어들 안심시켜라 비지땀”, “외국인 직접투자 영향끼치나 긴장” …. 기사 제목이란 게 조금씩은 선정적이라는 점을 감안하여도 김정일 위원장 사망 보도가 우리 경제에 미치는 파장을 짐작게 한다. 가뜩이나 유럽 재정위기에 지친 세계경제에 ‘한반도 돌발변수의 악재’가 아니냐고 외신들은 다투어 머리기사로 한반도와 주변국의 반응을 전하고 있다.

그런데 영국의 <비비시>(BBC)를 비롯하여 서울 주재 외신기자들은 서울의 거리 분위기에 크게 동요가 없다고 타전하고 있다.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당시의 ‘조문파동’에 비해 우리 정부와 언론의 반응도 일단 ‘신중 모드’를 보인다.

두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사업 등 그동안 우리 사회의 대북 행보가 이런 상황에서 미흡한 대로 일정한 안전판 구실을 했을 수 있고, 그간 달라진 한국의 위상이 우리의 스탠스를 한결 여유있게 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가스통 할배들’로 종종 희화화되는 노년층 일부의 과장된 몸짓을 빼면, 북한 변수의 리스크를 가늠하면서도, 지난 세월과 같은 이념적 과잉대응은 이제 우리 사회에서 많이 줄어들고 있다.

혹시나 내년 총·대선에서 메가톤급 북한 사태가 또다시 선거판을 요동치게 만들지 모르겠으나 선거철마다 등장하던 ‘북풍’의 위력도 이전에 비해 사그라들지 않았을까. 천안함 사태 직후 색깔논쟁 속에 치러진 작년의 6·2 지방선거에서는 오히려 무상급식이 선거판을 달구면서 야권이 약진한 바 있다.

기실 한국전쟁의 동족상잔을 몸소 겪은 세대의 트라우마를 어찌 폄하할 수만 있으랴. 하기는 요즘의 젊은이들은 상대적으로 풍족하게 자란 세대답게 한편 무연하게, 한편 연민으로 선대의 상처를 바라보는 감정의 여유를 지닌 듯도 싶다.

이렇듯 한바탕 주가가 폭락하고 환율이 폭등하는 북한 변수의 불확실성을 우리는 이제 비교적 차분히 배치하고 있다.


흔히들 경제는 불확실성을 싫어한다고 한다. 그런데 어쩌랴. 인생은, 역사는, 불확실성투성이인 것을. 불필요하게 불확실성을 증폭시키는 요인들을 줄이거나 제거하려고 노력할 수는 있으나 인간이 어찌 모든 불확실성을 다 제거할 수 있으랴.

그뿐인가, 불확실성이 하나도 없는 세상은 또 권태로워 어찌 살거나. 폭풍우의 밤이 지나고 맞이하는 고요한 아침바다의 태양이 장엄하듯이, 인생도 역사도 고난을 겪으며 다져지고 풍요로워지는 것을.

그러므로 문제는 이들 고난의 불확실성을 어떻게 맞이하고 치러내느냐 하는 시스템이리라. 개인적 차원에서, 사회적 차원에서 그런 불확실성을 치러내는 시스템이 잘 작동한다면 불확실성은 오히려, 혹은 비로소 혁신의 계기, 평상시라면 불가능한 비약의 계기일 수 있다.

발전을 위해선 혁신과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 그런데 사회안전망이 잘 갖춰진 사회라면 과감한 투자, 모험적 도전이 한결 용이하고 혁신과 구조조정이 훨씬 원활할 수 있다. 실업에 대비하는 직업훈련을 포함한 평생교육 시스템, 불의의 사고와 질병에 대비하는 의료복지 시스템, 휴식과 충전을 도와주는 주거복지 시스템 등 최소한의 사회생활을 보장하는 보편복지는 그래서 성장의 견인차이다.

김정일 위원장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불거진 이번의 북한 리스크 역시 경색된 남북경협과 한반도 정세에 긍정적 비약의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김윤자 한신대 국제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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