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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1.01 20:32 수정 : 2012.01.01 20:32

안병진 경희사이버대 미국학과 교수

아직도 인생은 아름답다고 생각하냐
하는 저들의 냉소적인 질문에
이제 실천으로 단호히 답해야 한다

“당신은 아직도 인생이 아름답다고 생각하십니까?” 영화 <박하사탕>에서 점차 영혼이 무너져가는 전직 고문 경찰관(설경구)이 우연히 자신이 고문했던 민주화운동가를 만나 던진 질문이다. 나는 이 질문에 자신 있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내 나름으로는 굴곡의 삶을 살면서 소름끼치는 사이코패스를 수없이 만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근태 선배라면 어떻게 대답했을까? 도저히 인간으로서 생각해낼 수조차 없는 가장 악랄한 전기고문을 받아 온몸이 망가진 채 살아가야 했던 그이지만 이 질문에는 단호하게 “네”라고 대답했을 것이라 난 확신한다.

그는 수많은 전설적인 기록을 가진 민주화운동의 상징이지만 나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기억이 따로 있다. 오래전 친한 재야운동권 선배의 행사에서 지켜본 그는 참 ‘바보’ 같았다. 모두가 힘 있는 정치인들과 눈을 맞추느라 바쁠 때 유독 그는 혼자 저 구석에 어색하게 앉아 있는 평범한 외국인에게 다가가 친절한 대화로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김 선배의 영어는 어눌했지만 그 여성의 행복한 표정을 난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날 난 어떤 이념이나 직책보다 더 따듯하고 아름다운 한 인간을 보았다.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그날 난 바보와 사랑에 빠졌다.

십수년이 지난 지금 이제는 우리 모두가 <박하사탕> 속 설경구의 냉소적인 마음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난 식당에서 계산대 앞의 박하사탕을 집어들면서 가끔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우린 다시 그 시절의 맑고 아름다운 사랑에 빠질 수는 없을까?

하지만 요즘 기분이 우울하다. 80년대 민주화의 시대만큼이나 거대한 시대적 전환기를 맞이했는데 맑은 열정과 깊은 생각보다는 혼탁한 동기와 표피적 이익으로만 세상을 보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마음에 여기저기 공적 지식인으로서 부딪쳐보지만 내공의 부족으로 별 성과가 없다. 어떤 이들은 이 과정에서 내가 정계에 진출하려 한다는 희한한 소문까지 내는 모양이다. 그들에게 인간의 행위는 아름다운 가치보다는 오직 계산과 국회의원 배지로만 설명되는가 보다.

또한 그들의 편협한 인생관과 달리 우리의 삶은 고결함으로 성숙해 갈 수도 있다. 지난해는 국내외적으로 분노와 민란의 시대였다. 극단적 불의와 천박한 탐욕 앞에 분노하고 저항하는 것은 가장 인간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과거 에마뉘엘 테레라는 철학자가 지적한 것처럼 분노는 거울 속 우리의 얼굴도 일그러지게 만든다. 올해는 분노와 저항에서 한발 더 나아가 저들도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인간적 고결함으로 새로운 미래를 디자인해야 한다. 김근태 선배는 자신의 온 삶을 파괴한 전기고문 기술자조차 용서하며 그들에게 인간의 고결함을 보여주었다. 아직도 인생은 아름답다고 생각하느냐 하는 저들의 냉소적인 질문에 우리 또한 이제 실천으로 단호히 대답해야 한다.

우리가 맑은 기운을 모아 새로운 대한민국의 모습을 만들어 가면 낡은 박정희 시대의 패러다임에 포획되어 있지만 다른 가능성을 찾는 이들도 결국은 마음을 열고 합류할 수 있다. 이미 진보와 보수를 떠나 이제는 대한민국이 박정희 시대의 특징인 특권층의 체제에서 모든 시민의 자유로운 삶을 위한 공동체(민주공화국)로 이행하고 있다는 인식이 공감대를 확대해가고 있다. 비록 김근태 선배는 작년 말 서거했지만 그의 오랜 민주공화국의 꿈은 드디어 올해 총선과 대선에서부터 실현되기 시작할 것이다. 저들이 우리를 분노로 일그러지게 하고 우리의 현실 속 계산이 앞설 때 언제나 그의 영정사진 속 따듯하고 바보 같은 미소를 떠올렸으면 좋겠다. 따듯하게. 바보같이. 안병진 경희사이버대 미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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