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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민 <문화방송> 전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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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이 시키는 대로 잘해왔거나
앞으로 시킬 중대 임무가 있거나
권력의 약점을 들어 저항하거나
김정일 사망 소식은 중국에 토요일 바로 전해졌다. 북한이 해외연락 채널을 끊어버리고 외교망이 분주해지면서 유럽·동남아시아의 기업·금융에는 일요일에 이상 동향이 잡혔다. 주말로는 이례적으로 북한 내에서 유무선 사용량 급증이 있었다. 북한에 촉각을 세운 당사자 대부분은 월요일 오전에 중대 변고를 들었다. 변고의 내용은 김정일 신상이라는 관측이 흘러다녔다. 이러던 차에 평양의 중대 방송 예고가 떴다. 직감을 가질 만한 여건이었다.
북한과 이해관계가 있는 당사자 중 우리나라처럼 월요일 정오 북한의 공식 발표로 김정일 사망 사실을 알게 된 경우는 드물다. 우리 관련 기관은 평양의 중대 방송 예고를 또 헛소리로 치부했다. 중대 방송 예고는 그동안 충분히 반복된데다 직감을 줄 만한 선행 첩보가 꽉 막혀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봐줘도 우리 당국은 월요일 오전에는 키워드를 알아야 했다. 청와대의 생일잔치는 국제적 웃음거리였다.
미국도 몰랐다는데 지난 일을 왜 복기하느냐고 말할지 모른다. 정답을 말하자면 미국은 모를 수 있지만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했다.
또 지난 10여년 동안 대북 인적 정보, 곧 휴민트(humint)에 구멍이 났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뿐일까.
주말에 기계적 정보, 곧 테킨트(techint)를 잘 살폈다면 적어도 북한 중심부와 지방 사이에 오가는 유무선 급증으로 이상징후를 읽을 수 있었다. 더구나 최근 조 단위의 돈을 쓰고 미국에 애걸해서 공중첩보기 에이왁스를 들여오지 않았는가. 시시각각 밀려와 산처럼 쌓인 기계적 첩보를 분석하고 판단해 정보로 만드는 작업은 사람의 몫이다. 누구에게, 어떻게 전파할지를 결정하는 일도 중요 판단에 들어간다. 그래서 첩보 수집과 분리된, 충분히 훈련과 경험을 쌓은 전문가가 필요하다.
주말을 복기해 보면 더 처참한 구멍이 보인다. 김정일 유고에 관한 첩보는 유럽과 아시아의 기본적인 외교·기업·금융망에서 돌아다녔다. 우리는 공사 간에 이 기본 네트워크에서 빠져 있었고 모두 손 놓고 있었다는 뜻이다.
여론의 질타를 받자 당국자들이 다른 정보를 슬쩍 흘려 책임을 줄여보려 했다. 되풀이된 이런 행태는 정보의 기초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모면하기 위해 일부러 모른체하는 것이다. 우리처럼 대치 국면에 처해 있는 나라의 공직자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이고 이적행위라고 비판해도 변명하기 어렵다. 일부 당국자는 현 정권의 일관된 대북정책에 김정일이 스트레스를 받아 일찍 죽은 것 아니냐고 때에 맞지 않는 해석을 내놨다.
중요한 진실은 이번에도 온 나라가 깜깜했다는 사실이다. 더 심각한 일은 무슨 문제가 어디에서, 왜,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 모른다는 점이다. 책임을 묻지 않기로 한 청와대 방침은 중대 결정이자 메시지이다. 경우의 수는 몇가지로 모아진다. 정보기관이 시키는 대로 잘해왔으니 그대로 하라는 말이거나, 앞으로 시킬 중대 임무가 따로 있어 그냥 넘어가거나, 정보기관이 권력의 약점을 들어 저항하는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정치권력이 변명을 듣고 별일 아니라고 판단했다면 문제가 문제인 줄을 모르는 무식과 무지에서 기인한다.
북한 정세를 보면 첩보 누락은 추억의 과거가 아니라 심각하게 진행중인 현재이자 미래다. 제대로 된 나라라면 첩보 누락이 일시적인 실수인지 구조적인 이유인지 따져 개선책을 내놔야 한다. 외교·국방·정보는 화해의 시대에도, 대결의 시대에도 항상 중대 현안이다. 권력이 침묵, 무시, 근거 없는 배짱을 보여도 정치권·전문가·언론은 문제로 제기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 현실에서는 들여다봐야 하는 시점과 계기를 멈춰 세우지 못하고 또 그냥 흘려보낸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신경민 <문화방송> 전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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