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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1.10 19:21 수정 : 2012.01.10 20:27

정재승 카이스트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립대는
‘친국민적인’ 태도를 취해야지
‘친정부적인’ 태도는 안 된다

 국민이 낸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립대는 국민들의 각별한 기대와 요구 속에서 성장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부여되는 시대적 요구는 달라지지만, ‘나라를 위해 꼭 필요한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는 사명 자체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이 사명은 학내에서 새로운 제도를 만들고 중요한 판단을 내릴 때마다 가장 중요한 의사결정 기준이 된다.

 “국립 고등영재교육기관의 학생들이 의학전문대학원을 가는 게 적절한가?” “국립대 학생들이 반정부 시위를 하는 것이 옳은가?” 같은 토론을 자주 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이런 토론에서 사회적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는 이유는 ‘국민적 요구’란 것이 실상은 모호하고 자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어서다.

 국립대는 늘 정부 눈치를 보며 교수나 학생들이 반정부 시위라도 할라치면 노심초사한다. ‘혹시라도 예산이 삭감되는 건 아닌지’ 걱정하며,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태도’라는 미명하에 친정부적인 태도를 취해온 것이 그간의 현실이다.

 그러나 국립대는 ‘친국민적인’ 태도를 취해야지, ‘친정부적인’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된다. 국립대의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은 ‘국민을 위해 무엇이 더 적절한가?’이어야 한다. 박정희 시절 대학이 그랬고, 전두환 시절 대학이 그랬듯이, 때로 국민의 이익과 정부의 이익이 대치될 때 학생과 교수는 용기를 내어 국민의 편에 서야 한다. 그것이 지식인의 책무다.

 학생과 교수를 억누르는 학교 당국만 탓할 수도 없는 것이, 실제로 ‘정치적으로 경솔한’ 행동을 했다가는 바로 정부의 압력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손에 쥐어진 그 알량한 권력을 어떻게 써야 할지 잘 모르는 정부를 우리는 여러 차례 경험한 바 있다.

 하지만 국립대라서 캠퍼스는 정치적으로 거세된 공간이어야 한다거나 국립대 학생들은 세상 돌아가는 일에 신경쓰지 말고 공부만 해야 한다고 국민들이 생각할까? 세상을 보는 통찰력을 가진, 그리고 시민을 위해 용기 낼 줄 아는 지식인을 길러내기 위해, 그들의 혈세가 쓰이길 국민들도 원한다. 그런 의미에서 얼마 전 카이스트 학생들이 ‘10·26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국선언을 한 것은 매우 적절한 행동이었다.

 ‘국립대에서 공부 안 하고 노는 학생에게까지 장학금을 줘선 안 된다’는 주장을 지난 1년 내내 들어왔다. 네 명의 학생이 자살을 하고 한 명의 교수를 잃고도, 살아남은 자들은 이런 주장의 뭇매를 학교 안팎에서 맞아야만 했다.

 문제는 장학금을 받을 학생과 그렇지 못한 학생을 가르는 기준인 ‘성적 3.0’에 있다. 국민들이 자신의 혈세를 카이스트에 지원할 때, 학생들이 모두 성적 3.0 이상의 능력을 갖길 원할까? 성적 3.0 이상이 혈세를 낭비하지 않은 인재의 최소 덕목일까?


 그렇지 않다. 카이스트는 과학 분야에서 21세기를 이끌어갈 창의적인 리더를 길러내기 위해 만들어졌다. 숱한 경쟁에서 이기고 카이스트에 들어온 국내 최고 인재들에게 국민들이 마땅히 해야 할 요구는 남을 이길 엘리트가 아니라, 남을 이끌 리더가 되어달라는 것이어야 한다.

 성적에 매몰되지 말고 실패해도 좋으니 시도해 보라고 기회를 주는 데 세금을 써야 한다. 그런 호사를 왜 국민의 혈세로 하냐고? 그것이 정부가 그토록 좋아하는 ‘21세기에 한국을 먹여 살릴 인재’를 키우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다시 추운 겨울이 왔다. 지난해 이맘때 카이스트는 소중한 학생을 잃었고, 그 후로도 몇명의 생명을 더 잃었으며, 카이스트에는 봄이 오지 않았다. 이런 일이 어디 카이스트에만 벌어지랴! 날마다 대한민국에선 ‘경쟁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의 신화’가 젊은이들의 풋풋한 개성의 싹을 도려낸다. 정재승 카이스트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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