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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1.11 19:14 수정 : 2012.01.11 19:14

학교 민주주의를 이야기할 때다
학교에서 차이를 존중하고
관용을 배우는 경험이 배제돼 있다

라디오에서 진행자가 묻는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 순위는? 아래 순위부터 넷째 돈, 셋째 건강, 둘째 가족. 나올 게 다 나온 것 같은데 그럼 첫째는 뭐지? 정답은 ‘아가’였다. 아, 맞아! 아가들! 아이들!

고단한 일상에서도 아이들을 보면, 내 아이든 남의 아이든 아이들의 웃음을 보면 ‘희망’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우리가 못 누린 것들을 이 아이들은 누리게 해야지, 그런 희망이. 미래는 더 나아질 거라는 그런 희망이.

귀가 별로 트인 편이 아닌데도 어렸을 때 슈베르트의 ‘마왕’을 들으면 느껴지던 공포감, 아버지의 낮은 목소리, 마왕이 무섭다고 외치는 아들의 공포에 질린 목소리, 그리고 속삭이는 마왕의 목소리, 아들을 안고 말을 달리는 아버지의 품속에서 그러나 집에 도착했을 때 아이는 마왕의 공포에 죽어 있었다는 그 노래, 아이였을 적에도 ‘어린이의 죽음’이 주는 두려운 자책감이 그 가곡의 울림을 비상하게 했던가 보다.

대구 중학생 자살 이후 학교폭력에 대한 뉴스가 이어지고 있다. 전부터 있어왔을 터인데 이제야 주목하는 것일 게다. 그 와중에 엉뚱하게도 학생인권조례를 탓하는 이들도 있다. 오히려 학생인권조례가 생기고 ‘학생의 인권’이라는 개념이 퍼져가면서 그동안 묻혀 있던 이런 일들이 그나마 드러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학교 민주주의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이야기할 때가 된 것이다.

고학년으로 올라가면서 입시에 밀려 점점 학급별 합창대회도 없어지고 미술시간, 음악시간, 특별활동시간은 줄어드는 교실, 뒷자리 절반 학생이 엎드려 자는 교실에서 상위 몇 퍼센트의 학생들을 데리고 입시기술을 가르친다. 아이들이 이지러지고, 가해자 혹은 피해자로 이런저런 또래 폭력에 노출되는 것을 이해할 만하지 않은가. 차이를 존중하고 관용을 배우는 학교 민주주의의 경험이 배제되어 있는 것이다.

듣자하니 정치권에는 ‘미운 사람 교육부 장관 시킨다’는, 뭐 그런 식의 농담이 있다고 한다. 실타래 엉키듯 한 복마전의 우리 교육, 교육이 문제라고 누구나 말하지만, 공교육을 정상화해야 한다고 누구나 말하지만, 그 방법과 내용은 저마다 제각각, 그래서 아무리 잘난 사람도 교육부 장관을 하면 욕이나 먹기 십상, 칭찬 듣기는 힘드니 미운 사람을 교육부 장관으로 보낸다는 말이겠다.

그런데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양극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양극화, 수도권 명문대학과 지방대학의 양극화, 심지어 같은 서울에서도 강남과 강북의 입시 양극화, 이런 양극화의 벽을 허물지 않는 한 교육현장에서 입시 위주 경쟁교육을 바꿔내는 데는 한계가 있다.

결혼시장에서 중소기업 직장인은 불리하다. 비정규직이면 대기업에 다녀도 불리하긴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대기업 정규직이 되려 이른바 스펙을 쌓고, 명문대학에 합격하려 사교육비를 쏟아붓고, 드디어 대학입시를 가리켜 ‘대한민국의 계급투쟁’이라는 칼럼 제목까지 나왔다.


그러므로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함께 성장하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가 해소되어야 숨가쁜 스펙경쟁 대신 학생들의 개성과 창의력에 주목할 수 있다. 거꾸로 부모의 경제력에 관계없이 교육 기회가 균등하도록 교육복지가 보편화되면 계층간 이동이 활발해지고 사회 양극화는 그만큼 멀어질 수 있다.

새해 벽두부터 복지와 경제민주화가 화두가 되고 있는 선거의 해, 아이들을 위해 이제는 교육을 좀 바꿨으면 좋겠다. 자살하는 아이들, 탐욕에 투표하는 우리들의 책임은 아닐까 두려운 자책감이 지레 밀려온다. 김윤자 한신대 국제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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