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2.01.18 19:16 수정 : 2012.01.18 19:16

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

고문 경관이 있는가 하면
당대의 지사들에게 감화받은
‘민주교도관’들도 있었으니…

베이지색 바바리코트 위에 머플러를 두른 공직자풍의 한 분과 부리부리한 눈빛에 감색 겨울점퍼를 입어 강력계 형사 같은 느낌을 주는 또 한 분-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과 나란히 단상에 선 두 남자는 유명인사는 아닌 듯했다. 일부 청중은 차를 마시러 마당 한쪽의 테이블로 다가가며 호기심 섞인 눈길을 그들에게 던졌다. 그러나 두 분에 대한 소개가 시작되었을 때 청중 사이에서는 탄성과 술렁거림이 일었고 이는 끝내 갈채로 이어졌다. 겨울 한낮의 햇살 아래 ‘역사적 진실이 처음으로 드러나는 순간이다’라는 느낌이 공유되고 있었다.

지난 1월14일 오후, 지금은 경찰청 인권센터가 되어 있는 서울 남영동의 옛 대공분실 앞마당에서 박종철 열사 25주기 기념식이 열렸을 때의 일이다. 두 남자, 온화해 보이는 안유씨와 다부져 보이는 한재동씨-그는 자신을 민주교도관이라고 소개했다-는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났던 당시 각기 영등포교도소의 보안계장과 교도관으로 근무했던 분들이다. 이들이 근무하던 영등포교도소에는 재야인사 이부영씨가 수감되어 있었고, 고문치사와 관련되었다는 두 경관이 새로 입소했다. 치안본부 고위인사가 두 경관을 회유하여 사건을 축소하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안 계장은 ‘국가가 학생들에게 몹쓸 짓을 한다’는 데 공분을 느껴 이부영씨와 상의했다. 이부영씨는 이 사실을 기록하여 한재동 교도관으로 하여금 밖으로 내보내게 했고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이를 세상에 드러냈다. 이는 곧 6·10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으니 한국 민주화 과정에서 두 교도관이 담당한 역할이 작은 것이 아니었다.

흔히 사람들은 자기의 상상이나 경험의 범위를 넘어서는 일을 두고 소설 같은 일, 혹은 영화 같은 일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때로 현실은 소설이나 영화보다 더 극적이다. 일반적으로 국가폭력과 이에 순응하지 않는 집단의 관계는 가해-피해 관계로 나뉘고 여기서 감옥의 관리자, 곧 교도관은 가해자 집단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이라는 책을 통해 원형감옥 속에서 이루어지는 인간행동에 대한 전면적·일방적 통제를 근대적 생활방식을 상징하는 기제로 들어올렸다. 나치 수용소의 일부 간수는 명령받은 것 이상으로 가혹한 사디즘적 행위를 유대인 수감자에게 자행해, 전후의 전범재판에서 생존자들이 이들을 가장 먼저 재판 대상으로 고발했다.

그런데 한국의 민주화운동 과정에서처럼 양심적 인사들이 수감되는 경우 양쪽 사이에는 인격적 교감과 소통이 이루어지고 이것이 역사적 의미를 갖는 관계로 진전될 수도 있음을 두 분을 통해 알게 되었다. 기념식 뒤풀이 때 듣기로는, 김지하 시인이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몇몇 교도관은 운동시간을 틈타 김 시인을 탈옥시킬 방안을 진지하게 논의했다고 한다. 안유씨가 사석에서 형이라 부르는 이부영 전 의장은 “이들이 군부독재하에서 권력의 횡포에 의분을 느꼈고 학생운동가, 재야인사들과 동지가 되었다”고 설명했다. 이근안 같은 고문경관이 있는가 하면, 생계 때문에 교도관이 되어 형사범들을 다루기는 하지만 당대의 지사들에게 감화를 받으면서 그들을 음으로 양으로 도왔던 ‘민주교도관’들도 있었으니, 인간의 영혼은 참으로 오묘하고도 다채롭다. 하긴 안중근 의사가 일본인 간수에게 미친 인격적 감화는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지 않은가.

1970년대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던 김학민 칼럼니스트는 교도관들의 구술사를 정리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밝혔다. ‘민주교도관’들의 역할을 파악한다면, 민주화운동사에서 지금까지 잘 이어지지 않았던 부분들이 말끔히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구상이 실현되기를 바란다. 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세상읽기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