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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1.24 20:15 수정 : 2012.01.24 20:15

장귀연 경상대 사회과학연구원 연구교수

20년 전 가리봉동에서 만난
중년 노동자의 말을 잊지 못한다
“힘든 사람끼리 안 뭉치면 어떡해”

딱 20년 전이다. 1992년 1월 한국노동당이 창당을 준비하고 있었고, 당시 대학생이던 나는 서울 구로지구당에서 잠시 일을 하게 되었다. 지구당 준비로 지역 주민들의 생활 실태와 의식을 조사하는 설문 작업이 있었는데, 대학생들에게 집집이 방문해 설문을 받아오되 가능하면 한국노동당을 홍보하며 조직화 가능성을 타진해보라는 일이 맡겨졌다.

몹시 추웠던 겨울로 기억한다. 살 에는 듯한 공기를 뚫고 눈 얼어붙은 길바닥에서 미끄러지며 하염없이 가리봉동 일대를 헤매었다. 거미줄같이 얽힌 골목마다 만(卍)자 깃발이 휘날렸다. 어느 날 동행했던 친구가 의아한 듯 말했다. “이 동네엔 참 절이 많네?” 좀더 물정을 알았던 내가 대답했다. “저건 절이 아니라 점집이라는 표시야!” 수많은 점집 깃발들이 희망을 대신하던 동네였다. 허술한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좁은 마당의 수도꼭지를 가운데 두고 ㄷ자로 늘어선 문들, 다시 그 문을 열면 한칸 부엌이 나오고 그 안쪽으로 단칸방 방문이 보이는 이른바 벌집들.

그러나 수줍음을 많이 타는 여학생이었던 나는 조직화는커녕 설문지를 들고 그 문을 두드리는 일조차 너무나 어려웠다. 용기를 내어 쪽방 문을 두드려도 대부분 일 나가고 인기척도 드물었다. 종일 헤매고 다녀도 설문지 몇 장 못 받다가, 좀 요령이 생겼다. 구멍가게나 소주집을 공략하는 것이었다. 문 열고 들어가기도 쉽고, 적어도 사람이 있으니까. 그렇게 설문에 응해주었던 한 아저씨, 정체가 불분명한 허름한 점포 안에 하나 놓인 탁자에서 혼자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던 남성 노동자의 말을 잊지 못한다.

중년을 훌쩍 넘어선 나이 든 노동자였다. 생활 실태와 지역 문제에 관한 설문을 지나 사회 현안에 대한 의견을 묻는 문항에 이르렀다. 국가보안법은 빨갱이들을 잡기 위해 꼭 필요하며 미군 주둔은 매우 고마운 일이라는, 즉 ‘진보적인’ 의식과는 거리가 먼 대답들. 속으로 약간 실망할 무렵, 그때 마침 울산에서 벌어지고 있던 현대자동차 노조의 투쟁에는 적극 지지한다는 것이었다. 약간 놀라 왜 그렇게 생각하시느냐고 물었다. “그 사람들도 사는 게 힘들어서 그런 거지. 나도 같은 처지라서 알아. 그렇게 힘든 사람들끼리 뭉치지 않으면 어떡하겠나. 그래서 나도 도와주고 싶지.” 말하자면, 노동자 연대의 의식이었다.

현대자동차 노조를 귀족노조라고 매도하는 말이 무성한 요즘이라면 잘 나오지 않았을 대답일 수도 있다. 그때는 현대자동차 같은 대공장이나 구로공단의 임금이나 큰 격차가 나지 않았다. 지금처럼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임금이 올라간 것 자체가 그렇게 뭉쳐서 싸운 결과다.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길, 노동운동이 분열되고 연대하지 않는다고 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공장과 하청공장, 생산직과 서비스직, 다른 세상에 사는 듯 무관심하고 때로는 서로 비난하기도 한다. 구체적 조건이 다르고 내 코가 석자니 무조건 관심을 가지라 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같은 처지다. 사는 게 힘들고 언제 잘릴지 모른다. 그렇게 힘든 사람들끼리 뭉치고 돕지 않으면 어떡하겠나.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해결을 위해 희망버스를 타고 부산까지 달려갔던 재능교육 조합원들의 심정이 그러했을 것이다. 지금 형편이 좀더 나은 대기업 정규직 노조도 예전에 뭉쳐 싸웠던 기억을 잊지 않아야 한다. 계급의식이나 진보적 인식까지 필요한 일도 아니다. 내 처지를 돌이켜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다른 노동자들의 힘겨운 투쟁을 공감할 수 있다. 힘든 사람들끼리 뭉치지 않으면 누가 도와줄까. 20년 전 구로공단에서 울산의 투쟁을 지지했던 나이 든 노동자의 소박한 말처럼.

장귀연 경상대 사회과학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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