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2.08 20:27
수정 : 2012.02.08 20:27
|
한정숙 서울대 교수
|
동아시아 역사가 모이는 곳이었고
이제 사람들이 서로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만나야 하는 공간
요령부득의 무슨 행정업무 때문에 필사적으로 컴퓨터와 싸우고 있는 저녁나절, 당신 사정 알바 아니라는 듯 전화벨이 울린다. 약간 억울해 하며 수화기를 드니 억세면서도 다정한 북방 억양의 한국어가 귓가를 두드린다. 그제야 화들짝 놀라며 목소리의 주인공을 맞이한다. 어머 세상에, 선생님, 이렇게 전화를 주시다니… 전화받기 직전까지 심드렁했던 태도를 반성하듯, 수화기 저 쪽 상대에게 인사에 인사를 거듭한다.
한복순 선생님이 러시아의 하바로프스크에서 걸어오신 전화였다. 1월 하순 혹한 속의 이 도시를 방문했을 때 우리 일행을 맞아 이곳 저곳을 안내해 주셨던 분이다. 영하 30도를 넘나드는 밤, 아무르 강의 칼바람 속에 눈길 밟으며 인적 없는 시내를 걷는데, 알렉산드라 김이며 이동휘, 안중근 같은 혁명가, 독립운동가들은 심장마저 얼게 할 추위 속에 비밀 모임 사이를 어떻게 오갔을까, 나의 속된 감각으로는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두툼한 솜옷이 최고랍니다.’ 어떤 분이 답했다. 하긴, 한복순 선생님만 해도 하바로프스크 못지 않게 추운 사할린에서 나고 자라 일흔 넘도록 건강하신 분이 아닌가.
한 선생님은 일제 강점기 징용으로 사할린에 끌려와 억류되었던 경남 출신의 부모님에게서 태어난 사할린 동포이시다. 같은 한국계라도 사할린 동포는 구한말 이전부터 연해주로 건너왔던 고려인과는 정체성이 다르고, 북한 사람들이나 한·러 수교 이후 건너온 한국인들도 각각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디아스포라 속의 디아스포라’를 겪은 고려인들의 세월도 눈물겹지만, 소련 시절 사할린 동포들은 여권에 민족명이 명기되는 소수민족으로 여겨지지도 않을 만큼 비존재적 존재들이었으니, 그 외로움이 어떠했을까.
그래도 그 분은 대학교육을 받고 교원 생활을 하며 한인으로서 정체성을 지키고 살아왔다고 하신다. 대부분의 친지들이 한국으로 영구 귀국했지만 자신은 가족 문제 때문에 남아 있는데, 젊은 세대는 러시아 사회에 동화되는 쪽을 선호하기 때문에 이제 이 도시에서 사할린 한인의 정체성을 지키고 사는 마지막 세대가 될 것이라고 한다. 그래도 너무 늦지 않게 이렇게 만나 뵐 수 있게 되어 다행이어요, 마음으로 인사를 드린다. 그것은 시베리아에 보내는 인사이기도 하다.
사실, 일제 강점하 독립운동 시절에만 해도 시베리아는 한국인들에게는 국경 너머 이어진 땅이었다. 지금은, 서로 오고 가지 못할 길은 아니지만 남북한이 싸늘하게 등을 돌리고 있기에 여전히 둘러 둘러가야 하는 곳이다. 한국 사람들은 섬에서 육지를 보듯, 이 쪽 기슭에서 먼 발치로 건너다보고 있다. 한복순 선생님은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도 얼굴을 감싸 안을 만큼 반가워하시더라고 일행 한 분이 전하던데, 그 마음이 이곳까지 닿을 수 있을지.
돌이켜 보면 한국이 시베리아를 알고자 하기 전에 시베리아는 먼저 한국을 인식하고 있었다. 19세기 후반 니콜라이 야드린체프의 저서를 보면 의미심장한 구절들이 나온다. 그는 <시베리아의 토착민들>(1891년)이라는 저서에서 한국인들을 언급하면서 “기원전 1000년까지 중국 북부, 즉 동북아시아에서는 고려족과 만주족이 지배했다. 그 가운데 두 민족 선비족과 여진족이 가장 주목할 만했는데 이들의 문화적 흔적은 바이칼 피안(동남)지역에 남아있다”고도 했고, “13세기 이전까지 중앙아시아에서는 고려인, 퉁구스인, 투르크인이 지배했다”고도 썼다. 출전 표시가 없어 한국 고대사에 대한 그의 지식의 원천을 알 수는 없지만 한국인과 동아시아에 대한 시베리아 출신 지식인의 관심과 인식이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시베리아는 여러 모로 우리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그런데 과거의 인연이 어떠했건, 한국 사회는 시베리아를 자원의 공급자로만, 경제적 이득의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곳은 동아시아의 역사가 모이는 곳이었고 이제 사람들이 서로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만나야 하는 공간이다. 눈과 찬바람이 머물다 가는 곳일 뿐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곳, 우리와 말이 통하고 그리움을 나누는 사람들이 있는 곳, 이어진 길을 따라 그곳까지 갈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