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2.12 19:25
수정 : 2012.02.12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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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섭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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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환 헌재 재판관 선출안 부결로
가장 곤란한 처지에 놓일 사람은
청문회에 서게 될 다음번 후보자다
조용환 헌법재판소 재판관 후보자에 대한 선출안이 국회에서 부결되었다. 야당에서 추천한 후보자의 선출이 좌절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여당인 새누리당에는 다수의 힘으로 헌법 정신까지 무시했다는 비난이 쏟아진다. 뚜렷한 전략도 없이 상정에 동의하고 상당수 의원이 표결에 불참하기까지 한 민주통합당에 대해서도 여론의 눈초리는 곱지 않다. 정치권 전체가 곤혹스러워하며 책임을 미루기에 급급하다. 그러나 이번 결과로 가장 곤란한 처지에 놓일 사람은 그들이 아니다. 다음번 헌재 재판관 후보자로 청문회에 참석해야 할 사람이야말로 어려운 선택을 맞게 되었다. 천안함 사건에 대해 똑같은 질문을 받게 될 때, 혹은 비단 천안함 사건이 아니더라도 정부의 발표에 대해 의혹의 시선이 엄연히 존재하고 확증이 없는 문제에 대해서 “확신한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추궁을 듣게 될 때 그는 과연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하는가.
조용환 후보자에게, 다수가 분명하다고 믿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는 가장 폭력적인 비논리를 당연하다는 듯이 설파한 사람은 평소 저격수 소리를 듣는 정치권의 싸움꾼이나 이데올로기에 눈먼 ‘꼴통’ 인사가 아니다. 헌법을 전공한 법학 교수 출신의 국회의원이다. 끝까지 확신한다는 표현을 쓰지 않은 후보자에게 “부적격한 국가관”을 가졌다느니 “눈으로 못 봐 못 믿는다면 어떻게 판결하나”라는 유신 때나 볼 법한 사설을 들이밀면서 사퇴를 강요한 신문들은 극소수가 읽는 선전물이 아니다. 가장 많은 발행부수를 자랑하며 ‘정론지’임을 내세우는 주류 매체들이다. 이런 국회의원들과 언론의 주시를 받으며 청문회장에 서게 될 다음번 헌법재판소 재판관 후보자도 당연히 같은 질문을 받게 될 터이다. 그때 그는 ‘다수가 분명하다고 믿고 있다면’ 확신해야 한다는 대답을 내놓아야 할 것인가. 그리고 그가 확신한다는 말을 할 때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10월 유신 이듬해인 1973년, 당시 400명이 안 되는 전국의 법관 중 41명이 재임용 탈락으로 법복을 벗었다. 그 직전 박정희 대통령은 판사들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판결을 내린 사례가 있다”고 비난을 퍼부었고, 민복기 대법원장은 재임용에서 탈락한 판사들에 대해 “국가관이 없는 판사들이다”라는 평을 했다. ‘부적격한 국가관’을 가진 판사들을 잘라낸 이후의 사법부가 어떤 모습을 보였는지 우리는 분명히 목격했다. 증거도 없는 조작사건으로 억울한 사람들을 수십년씩 옥살이하게 한 선배 법관들 때문에 40년이 지난 지금도 판사들은 법정에서 고개 숙여 사죄를 한다. 소수자를 보호하고 약자의 목소리에 귀기울여야 하는 사법부 본연의 임무는 당연히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또 한사람의 재판관 후보자를 ‘국가관’이라는 잣대로 떨어뜨렸다.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것 이상을 가질 수 없다. 헌법을 전공한 국회의원이 무릇 헌법재판소 재판관이라면 다수의 의견과 동일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훌륭한 소수의견을 꿈꿀 수 있겠는가. 아무리 그럴듯해 보이는 주장도 의심해보고 아무리 터무니없어 보이는 견해에도 한번은 귀를 기울여봐야 한다는 너무나 당연한 답변에 ‘부적격한 국가관’을 들이대는 ‘주류 언론’들 속에서 우리가 어찌 소수자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헌법재판소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우리에게는 “다수가 믿고 정부가 발표한 것이라면 무조건 확신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재판관으로만 구성된 헌법재판소가 어울릴지도 모른다. 도대체 유신 때 국회나 언론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너무나 참담한 심정이다. 금태섭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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