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3.07 19:18
수정 : 2012.03.07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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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자 한신대 국제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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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릿고개 넘기며 수출을 독려하던
시절부터 오늘까지 한국 대기업은
‘국민적 희생’으로 커오지 않았던가
객지에 가면 내 고향 까마귀만 봐도 반갑다는 말이 있다. 물류가 발달하기 전의 이야기지만 세계화가 한창이라는 요즘도 태어나고 자란 곳에 대한 친애감은 여전하다. 식민지 지배를 받으며 근대를 통과한 우리는 “내 나라”, “내 겨레”, 이런 말들이 주는 파토스가 유난히 강렬한 듯싶다.
그래서 외국에 나갔을 때 우리 차가 외국의 거리를 달리는 것을 보면 다들 반색을 한다. 영국 런던의 명물 피커딜리 광장에서 삼성의 커다란 전광판을 보면 모두들 흐뭇하여 기념사진을 찍는다. 그뿐인가, 러시아 모스크바에 출장 갔을 때 다리 양쪽을 엘지의 광고깃발이 장식하여 일명 ‘엘지 다리’라고 불리는 곳이 있어 현지 기사에게 한번 더 달려보자고 부탁했던 기억이 있다. 하기야 분단의 약점 때문에 여전히 강대국 눈치를 보는 처지에서 그네들 도시 한복판에 내 나라 대표 상품이 의젓이 버티고 있는 모습은 자랑스러울 만하다.
따지고 보면 허리띠 졸라매고 보릿고개를 넘기며 수출을 독려하던 시절부터 고환율정책으로 수출대기업을 지원하는 오늘까지 한국의 대기업은 금리특혜와 조세특례를 누리며 ‘국민적 희생’으로 커오지 않았던가. 심지어 10대 그룹 재벌 총수들이 모두 23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도 집행유예로 풀려나 실형을 전혀 살지 않았다는 “수치스러운 사법특혜”의 통계까지 있으니.
영국의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한국 증시가 저평가된 가장 큰 원인이 재벌의 불법적인 경영권 승계와 세금 탈루 때문이라고 지적했지만 총수 일가 중심의 불투명한 경영은 한국 경제의 신뢰를 실추시키는 또다른 원인이 되어왔다. 재벌의 영문 표기가 예전에는 일본식 한자발음을 따서 ‘자이바쓰’(zaibatsu)로 쓰이더니 이제는 한국의 한자 발음을 따서 ‘재벌’(chaebol)로 쓰이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도 재벌가 형제들의 반목이나 뜻하지 않은 죽음, 자식들의 불행한 소식을 접할 때에는 “만석꾼은 만 가지 걱정이 있고 천석꾼은 천 가지 걱정이 있다”는 옛말이 떠올라 연민을 금할 수 없다. 나라도 그렇지만 개인도 재물만으로 행복하고 존엄할 수는 없는 것을.
‘미행 스캔들’에 이은 삼성가의 상속분쟁을 보면서 민망하고 안타깝다. 삼성의 상속분쟁은 그 자체가 차명재산과 순환출자의 지배구조 등 그룹 전체의 명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불합리한 편법적 지배구조를 “근대화”하고 경영을 합리화하는 재벌개혁이 우리 경제의 효율성에도, 가족 간 분쟁의 해결에도 지름길 아닌가.
그런데 반도체, 자동차, 휴대전화 등 대기업의 주요 품목은 이미 내수 판매보다 수출 판매 비중이 높고 생산도 해외생산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스마트폰의 해외생산 비중은 70%, 자동차도 절반이 넘는다. 인건비와 물류비용을 절감하려는 목적 외에 무역장벽을 회피하려는 목적도 있어서 해외생산의 비중은 앞으로도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이들의 생산은 현지의 부가가치 생산 및 소득 증대에 기여한다. 이 때문에 이들 기업의 실적이 좋아도 국민경제는 실감을 못하는 괴리가 발생하고 있다.
이 간극을 메우려면 부품과 소재의 국산화율을 높여서 완제품 생산의 외화가득률을 높여야 한다. 또 중소기업에 대기업의 과실이 골고루 돌아가게 공정거래 질서를 확립하는 것이 급선무다. 전문가들은 대기업 위주의 산업정책을 중소기업 육성 정책으로 바꿔야 한다며 아예 중소기업부를 만들자고 제안한다.
허리띠 조르고 고환율의 물가를 견디며 대기업을 키워온 국민들의 인내심도 한계에 이르고 있다. 이래저래 재벌개혁의 대상이 되기보다 스스로 개혁의 주체로 나서면 좀 좋을까.
김윤자 한신대 국제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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