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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3.14 19:14 수정 : 2012.03.14 19:14

이창근 쌍용자동차 해고자

비정규직은 차별을 폐지해야 하고
불법 정리해고는 기업주를 처벌해야
다른 대책은 선거용 애드벌룬일 뿐

해고된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동계’라는 틀로 표현되는 것이 언젠가부터 적확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탄압의 영역은 넓고 고통의 시간과 아픔이 무척이나 깊은 이들인데 말이다. 그렇다면 이들을 어떻게 부르면 좋을까. 나 같은 사람의 처지를 반영할 수 있는 표현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던 차에 ‘해고계’라는 말을 들었다. 처음 접한 것은 알고 지내는 분이 언제가부터 트위터상으로 내게 이 말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처음엔 피식 웃어넘겼다. 그런데 자꾸 듣다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매번 길 위에서 경찰의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되고 끌려가고, 천막과 텐트 그리고 노숙으로 잠을 때우는 것이 일상인 나 같은 사람들을 해고계에 속한 이들이라 부르는 건 어쩌면 딱 맞는 표현 같았다. 일하던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저항하는 사람들, 비정규직의 차별의 사슬을 끊어내기 위해 투쟁하는 이들, 재벌권력의 무한착취에 맞서 끊임없이 바위를 굴려 올리는 이들을 해고계 사람이라 하는 것이 마음 아프지만 적나라한 현실의 단어임엔 틀림없어 보인다.

선거철이 돌아왔다. 총선과 대선이 있는 올해 4·11 총선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한다. 이명박 정부의 반민주·반역사적 행태와 권력의 중심으로부터 풍겨나오는 악취의 부패 사슬과 비리는 이번 선거를 통해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고도 한다. 이성 잃은 공권력을 동원한 국가폭력을 이번 참에 바로잡는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수긍되면서도 의문과 의구심으로 뒷맛이 영 개운치 않다. 구럼비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잔상이 2006년 평택 대추리 때와 너무나 닮아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지난 정권 또한 농민이 죽고 노동자가 분신으로 내몰리는 처참했던 현실이었음을 다시 한번 복기하는 불편함을 주려 함도 아니다. 이 개운치 못한 뒷맛의 배경엔 터져나오는 노동자와 시민 그리고 비정규직의 설움과 분노의 열망을 여야 구분 없이 정치권이라는 작은 울타리에 매번 가두고 관리하려는 시도 때문이다. 선거철마다 반복되는 이 허울 좋은 시도들이 오히려 해고계를 점점 팽창시켰으며 더욱 잔인하게 만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정치권은 여전히 모른 체하면서 말이다.

900만 비정규직의 문제는 이제 한국 사회의 판을 흔들고 구조의 변화를 시급히 마련해야 하는 지경으로 급속히 치닫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권력과 자본의 입장에선 안정된 이윤착취 시스템이 붕괴될 수 있다는 초조함마저 빠르게 번지고 있다. 결국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대책을 정치권이 앞다퉈 쏟아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비정규직 보호 법안이 비정규직 양산 법으로 둔갑하고, 정리해고 요건 강화를 중심 뼈대로 하는 정리해고제 또한 자본의 편의만을 위한 눈가림 제도로 진행될 확률이 높다. 비정규직은 차별을 시정할 것이 아니라 차별을 폐지해야 하고, 합법을 가장한 불법적 정리해고는 기업주에 대한 사법처리가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은 대책은 선거용 애드벌룬처럼 선거의 열기가 식으면 어딘가서 바람 빠진 채 방치되었다 선거철에 다시 등장할 것이다. 이것은 사실이며 현실이란 걸 우리들의 아픈 경험이 말해주고 있다.

선거철 정치권의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진정성은 당사자들 의견에 얼마나 귀를 열고 있느냐일 것이다. 정리해고 철폐와 해고금지법, 비정규직 차별철폐와 정규직화 쟁취라는 해고계 당사자들의 요구가 대책의 중심이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해고계 노동자의 눈물은 두 줄기로 흐른다. 설움의 눈물과 분노의 눈물이다. 정치권이 어떤 눈물을 선택할지 지켜볼 것이다.

이창근 쌍용자동차 해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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