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3.20 19:22
수정 : 2012.06.06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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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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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희롱 문제를 특정한 개인-타자의
문제로 치부하고 센세이셔널리즘으로
처리하는 위선은 ‘제~발 좀 그만’
최근 한 국회의원 예비후보가 이른바 ‘여성 비하’ 발언으로 결국 공천 대상에서 배제되었다. 여성에게는 ‘하나 더 있는 것’이 문제의 진원지인데, 발언의 내용이 알려지면서 사회적 파문이 일자 다급해진 그는 여성의 우수성과 국가발전을 위해 여성 인력의 활용과 사회적 진출 확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고 변명했다. 그는 무슨 잘못을 한 것일까? ○○을 ○○이라 하는데 도대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필자는 내심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등장하는 남성들처럼 한국 사회 남성들이 지닌 지극히 ‘평범’한 인식수준을 만천하에 폭로한 그에게 상이라도 주고 싶은 심정이다. 우선 그의 첫번째 발언은 남자들에게 여자는 인격체가 아니라 단순히 ○○에 불과하다는, 풍문으로만 듣던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고, 이어진 변명은 ○○이 ‘우수한 인력’과 억지스러운 상관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우수한 여성은 결국 ○○의 능력으로 판명된다는 말인지, 능력이 아무리 뛰어난 여자라도 결국은 특정한 ○○에 불과하다는 것인지 여전히 모호하지만, 확실한 것은 종종 잊고 있던 바로 그 사실, ○○이 두 개 있는 사람은 ‘생물학적 여자’이자 ‘일방적 대상으로서의 성’(여/성)일 수밖에 없는 현실의 재확인이다.
그동안 상대적으로 힘이 있는 공인들의 여성 비하 발언과 성희롱 사건이 무수히 있었지만 대부분 개인의 도덕성 문제로 치부되었고, 이들 중 상당수는 ‘동료애’와 ‘우정’ 덕분에 무사히 직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발언과 행동이 술자리에서 혹은 남성들만 있는 사적인 자리에서 이루어졌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평상시의 생각을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외연화한, 뭔가 일진이 안 좋았던 그분만 ‘억울하게’ 된 것이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한 국립대 성희롱 교수에 대한 미온적인 대학당국의 처분을 둘러싼 공방도 유사한 수준에서 진행되고 있는 듯하다. ‘억울’하다고 생각한 교수는 각종 음해론과 우발론을 섞어가며 동료들을 향해 자신을 열심히 방어하고 있을 것이고, 반대편에 선 많은 이들은 특정 ‘변태’ 교수의 일로 개인화하는 데 골몰한다. 혹은 조용히 ‘재수 없게 걸린’ 그를 동정하며 숨죽인 채 관망하고 있겠지.
생각해 보라. 매일 하는 말과 생각, 실천들을 특정한 상황에서 억지로 틀어막는다고 될 일인가. 바느질이 서툰 자들이 꿰맨 봉합선은 언제고 터지기 마련이라 결국 비난받는 대상은 바느질을 잘못한 사람이 된다. ‘기술’이 부족한 이들에게는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불운한’ 혹은 ‘무지한’ 특정인이 공적인 장소에서 ‘여성의 ○○’을 버젓이 입에 올렸다는 점이 아니라, 그 ○○을 준거로 형성되고 지탱되는 남성들의 문화와 연대의식, 이를 재생산하는 우리 사회의 수준이다. 대학 캠퍼스에서건 술집에서건 여/성을 ○○으로만 취급해야 유지되는 연대, ○○의 수에 따라 위계질서가 형성되고 낙인이 부여되는 문화는 결국 이를 용인하고 장려하는 우리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제 성희롱 문제를 특정한 개인-타자의 문제로 치부하고 센세이셔널리즘으로 간단하게 처리하는 위선은 ‘제~발 좀 그만’ 떨자. 때맞춰 바느질을 잘하는 법에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늘 있는 일들을 급하게 봉합해야 하는 억지스러운 상황들, 이를 뒷받침하는 문화적 실천들과 조건들을 근본적으로 재고하고 해체하며 재구성하고자 노력하자. 무엇보다 일상 속에서 성적 실천과 인식을 성찰하고 변화시키는 일은 나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문제는 바로 우리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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