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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4.02 19:20 수정 : 2012.04.02 19:20

윤석천 경제평론가

투표는 민주화를 실현하는
가장 좋은 수단이다
경제민주화 역시 마찬가지다

선거 때문일 거다. ‘민주화’란 단어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지겨울 법도 하건만, 그 단어를 들으면 여전히 콧날이 시큰거린다. 심지어 주먹까지 쥐게 된다. 386세대여서만은 아니다. 암울한 시대 탓일 거다. 아직도 국민은 주인이 아니다. 국가는 끊임없이 국민을 감시하고 그 입에 재갈을 물리려 한다. 민주주의는 국민이 권력을 갖는 것인데 그 진부하기까지 한 진실이 새삼스럽다. 내가 권력의 주체란 사실이 어색하기만 한 오늘이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니 예전의 민주화를 말하는 게 아니다. ‘경제’란 수식어가 앞에 붙어 있다. 익숙하던 정치민주화가 아니다. 정치적으론 민주화가 어느 정도 진전되었다 생각해서일까. 아니면 선거 구호로 쓰기엔 너무 고리타분한 냄새가 나서일까. 어쨌든 들리는 건 경제민주화이다.

경제민주화가 도대체 무얼 말하는 걸까. 정치민주화만큼 일반화된 단어가 아니니 해석도 분분하다. 일부 보수는 아예 유령 취급하면서 무시하려고까지 한다. 하지만 우리 헌법은 이미 이 단어를 명확히 정의해 그 실체를 확인해주고 있다.

헌법 제119조 2항은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해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위 조항에 경제민주화의 요체가 담겨 있다. 적정한 소득의 분배,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 방지가 그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국가의 부는 국민에게 있으며 그 부가 소수에게 집중되지 않도록 하는 게 경제민주화란 얘기다. 정치민주화가 권력의 소유권을 국민에게 돌려주는 과정이라면, 경제민주화는 국부의 소유권을 국민에게 돌려주는 과정을 말한다. 우리 헌법은 이것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럼에도 대부분은 경제민주화에 대한 개념이 없다. 정치민주화가 이루어지면 경제민주화는 그냥 따라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 둘이 항상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건 아니다. 정치민주화가 진전해도 경제민주화는 얼마든지 퇴보할 수 있다. 한국이 좋은 예다. 소득의 편차는 갈수록 심해지고 있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은 나날이 소수에게 집중되고 있다.

이는 물론 정치의 잘못이다. 의도적으로 경제민주화에 대한 일반의 접근을 막았다. 왜곡도 서슴지 않았다. 대표적인 게 개인적 능력이 부의 수준을 결정한다고 믿게끔 한 것이다. 구조적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게 했다. 능력을 강조해 불공평을 당연시했다. 세상이 바뀌지 않는 건 기득권의 이런 논리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경제민주화가 요원한 건 그들의 논리를 오히려 추앙하며 받들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소수의 국부 독점은 점점 심해지고 있다.

투표는 언제나 민주화를 실현하는 가장 좋은 수단이다. 경제민주화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투표가 최선일까. 정치민주화건 경제민주화건 자신의 이해에 충실한 투표를 하는 게 가장 이상적이다.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가장 잘 구현해줄 수 있는 사람 혹은 정당을 선택할 때 경제민주화는 비로소 시작된다.

존재는 의식을 결정한다. 가난한 자의 편에 서는 부자는 드물다. 역사가 증명한다. 선거란 나를 대리할 수 있는 사람을 뽑는 과정이다. 즉 또다른 나를 선택하는 행위이다. 그렇다면 내 처지와 가장 비슷한 사람·정당에 투표할 일이다. 부자가 부자를 택하듯 서민은 서민적 인물을 선택하면 된다. 그게 경제민주화를 이루는 첩경이다. 그래야 공평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 지키지 못할 허황된 공약에 끌릴 일이 아니다. 기득권의 이념에 매몰될 일은 더욱 아니다.

윤석천 경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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