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4.10 19:24
수정 : 2012.04.10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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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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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행위는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흥밋거리에 불과할지 모르나
누군가에겐 생존을 위한 투쟁의 장
대한민국은 지금 정치의 계절이다. 봄바람에 하얀 꽃잎이 날리기도 전에 여의도엔 욕망의 먼짓가루가 자욱하다. 내 눈에는 그 뿌연 먼지바람을 뚫고 희미하게 떠오르는 영상이 보인다. 어찌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슬픔의 수동적 정서에 사로잡혀 있는 아픈 우리 ‘청춘들’. 그 얼굴 위로 영화 <화차>의 차경선이 오버랩된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지워진 부채, 이로 인해 각종 폭력에 시달리고 개인 파산자가 된 그녀는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또다른 우리 사회의 타자,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무관심의 대상을 택하여 이름을 훔치고 인생을 도용하며 결국 멈출 수 없는 화차에 오른다. 생존을 위해 선택되는 죽음의 역설. 이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잘난’ 부모가 있든 그렇지 않든 많은 청춘들은 지금 아프다. 심화된 계층 양극화, 붕괴된 공교육 시스템, 대학 이름에만 목숨 거는 부모들, 감당하기 어려운 등록금에도 불구하고 양질의 교육이 보장되기는커녕 신용불량자만 양산하는 대학, 온통 경쟁과 효율 논리에 휘둘려 돌아가다 결국 부딪히고 마는 거대한 취업의 문. 그나마 이들은 무대 안의 청춘들이다. 무대 밖에서는 희미한 조명조차 받지 못하는 많은 청춘들이 있다. 이들은 어둠 속에서 오로지 생존을 위해 전투중이다. ‘학교’ ‘가족’ ‘사회’를 구성하는 정상성의 범주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일찍이 차갑게 냉대받고 사회에 내팽개쳐진 그들은 각종 차별과 착취에 시달리며 그저 이름 없는 타자로 살아간다. 때로는 부모를 원망하고, 때로는 주어진 ‘조건’을 비판하지만 대부분은 조건의 구조적 속성을 파악조차 못한 채 살아가거나, 그러한 조건을 지탱하고 재생산하는 권력이 두려워 숨죽인 채 살아간다. 그러므로 세상은 누구에게나 잔인하지만 모두에게 꼭 같은 무게의 고통을 요구하진 않는다. 어떤 이는 견디고, 어떤 이는 극복하며, 어떤 이는 죽는다. 그러한 ‘불공평한 잔인함’에서 더 많이 아픈 사람이 늘 존재하기 마련이다.
불안과 공포를 권력의 작동과 유지를 위해 부단히 요구하고 재생산하는 사회, 개별적 능력 향상이 권력에의 종속과 직결되는 사회에서, 이름 없는 존재들은 그저 살아남기 위해 투쟁한다. 살아남지 못하면 결국 지는 것이며, 지는 것은 삶의 중단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살아남기 위해 할 수 있는 가능한 선택지는 무엇일까? 투표행위는 ‘타자화’라는 폭력, 타자에의 종속을 끊어낼 잠재성을 실험하는 장이다.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흥밋거리에 불과할지 모르나 누군가에겐 생존을 위한 투쟁의 장이기도 하다. 내 존재가 구성되는 바로 그 지점에 위치하며 세상을 재구성하는 생존의 몸부림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내 삶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도구를 발견하는 것이며 대변인을 선택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의 몸짓으로 세상은 그다지 바뀌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공고화된 헤게모니에 균열을 낼 수만 있다면, 그리고 균열이 여러 곳에서 진행되기만 한다면 언젠가 거대한 바위도 깨트릴 수 있으리라.
자, 아픈 청춘들아, 이제 투표장으로 가자. 너희를 옥죄는 사방 감옥으로부터 탈출하여 훨훨 날기 위한 생존의 첫걸음이다. 앎의 기피를 강요하는 사회에서 앎을 향한 의지는 늘 용기를 동반하지만 세상은 작은 용기들이 모일 때만 늘 변화해 왔다. 지금 이 글을 읽을 때쯤이면 아마도 앎을 향한 그 행위는 어떤 방식으로든 진행중이겠지. 혹은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을지도 모른다.
오늘 그 앎의 기피와 앎의 의지 간의 충돌은 결국 어떠한 권력의지로 수렴될 것인가? 그리고 여의도에는 어떤 꽃이 필 것인가? 나는 진심으로 궁금하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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