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4.17 19:23
수정 : 2012.04.17 19:23
|
장귀연 경상대 사회과학연구원 연구교수
|
노동법이 있어도 노동자는 약자인데
그마저도 회피하려는 꼼수가 생겼다
노동자를 ‘고용’하지 않고 일 시키기
지난 1월 재능학습지교사노조의 농성이 1500일을 기록했을 때 <한겨레> 사설은 봄이 오기 전에 재능노조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벚꽃과 목련이 피는데, 농성 천막은 걷히지 않았다. 봄인가. 그렇지 않다. 아스팔트 위의 농성장에는 두 계절밖에 없다. 땅바닥의 차가운 냉기가 좀 잦아드나 싶자마자 이글거리는 열기가 올라오곤 한다. 그 두 계절을 네 번씩 겪었다. 셰헤라자드는 1000일 만에 왕의 마음을 바꿨는데, 재능교육 회사 쪽은 아라비아의 왕보다 훨씬 완고하다.
재능노조 투쟁은 왜 이리 장기화되고 있나? 회사가 망한 것도 아니다. 영업을 잘하고 있다. 노조를 인정하고 단체협약을 체결하고 노조활동으로 해고된 사람들을 복직시키라는 요구는 일견 노동법상으로도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 함정이 있다. 학습지교사들은 노동법이 적용되는 노동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학습지교사, 보험설계사, 방송사 구성작가, 출판 편집자와 디자이너, 애니메이션 작화가, 애프터서비스 기사, 택배 기사, 이하 지면관계상 생략. 수많은 사람들이 분명히 회사에 소속되어 그 회사 일을 하는데도 회사가 고용한 노동자가 아니란다. 노동자가 아니라 개인사업자 또는 프리랜서. 회사와 대등한 사업자, 자유로운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노동법 같은 건 적용할 필요가 없다는 거다. 그러나 이들은 정말 자유로운가?
자유로운 사업자라면 마음대로 일하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이익은 온전히 자기 몫이어야 한다. 하지만 이들은 회사가 시키는 일을 한다. 그리고 이들의 노동을 통해서 분명히 회사는 이익을 얻는다. 만약 회사가 일거리를 주지 않거나 계약을 해지하면 꼼짝없이 실업자 신세, 먹고살기 위해서는 다른 직장을 알아보고 다시 노동력을 팔아야 한다. 사업계약서를 썼든 근로계약서를 썼든 마찬가지다.
기실 노동자는 자유롭기 때문에 보호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은 자본주의가 시작될 때부터 있었다. 노동자가 자유롭게 회사를 그만둘 수 있다면 회사도 자유롭게 노동자를 해고해야 평등하지 않나. 자유롭게 합의하면 되지 왜 최저임금이니 법정근로시간이니 하는 법을 만든단 말인가. 노조 교섭이란 시장 가격인 임금을 담합하는 것이니 공정거래 위반 아닌가. 한마디로, (노동)시장에서 쌍방의 동등하고 자유로운 계약인데 왜 한쪽 편을 보호하는가.
그 답은, 쌍방이 전혀 동등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기업은 한 노동자가 회사를 그만둔다고 타격을 입지 않지만, 노동자는 해고되면 생계가 막막해지고 그러다보면 아무리 부당한 노동조건도 감내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의 자유라면 굶어죽을 자유밖에 없다. 그래서 노동조합법이나 근로기준법 같은 노동법이 생겼다. 그렇게 해도 노동자는 약자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노동법은 노동자가 그를 고용한 기업 앞에서 전혀 자유롭지 않은 것을 조금이나마 상쇄하는 장치일 뿐이다.
그런데 그마저도 회피해 가려는 꼼수가 생겼다. 노동자를 ‘고용’하지 않고 일 시키기. 개인사업자니 프리랜서니 그럴듯한 말을 들먹이며, 노동자는 기업과 동등하고 자유롭기 때문에 노동법 같은 건 필요 없다는 것이다. 위장된 ‘특수고용’이라는 여론이 일자, 고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출근부를 없애고 급여도 수당이라는 말로 바꾼다. 프리랜서의 자유는 딱 그만큼이다. 매일 출근부를 기록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 그리고 지극히 불안정한 임금 때문에 수당을 위해서 몸 상할 때까지 일해도 되는 자유.
노동법이 만들어진 기본 취지를 생각하면 당연히 특수고용 노동자들에게도 완전한 노동권이 인정되어야 한다. 재능노조원들이 목숨을 건 천일야화를 두 번씩 쓰게 할 수는 없다.
장귀연 경상대 사회과학연구원 연구교수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