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5.08 19:27
수정 : 2012.05.08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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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귀연 경상대 사회과학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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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울하고 견고해 보이는 현실도
결국 바꿀 수 있을 거라는 희망
지난 1년간 내가 글을 쓴 이유다
1년 전 ‘세상읽기’ 난에 나의 첫 칼럼을 썼다. ‘대학생이자 노동자인 청년들’이란 제목이었다. 대학에서 노동사회학을 가르치면서 나는 ‘알바’에 지친 학생들을 강의실에서 만났고, 비정규직 노동자의 애환이 가득 넘치는 그들의 리포트를 읽었다. 비싼 등록금을 받는 대학과 비정규직 노동자를 쓰는 기업이 이익을 보는 사이에서 시들어가는 청춘들. 오랫동안 그런 모습을 보고 겪었기 때문에 그것이 나의 첫 칼럼 주제였다. 마지막에 내 학생들의 리포트에서 노동자의 분노와 슬픔보다는 보람과 기쁨을 더 많이 보고 싶다고 썼다.
그 글을 쓰고 나서 몇달 뒤 신문에서 대학생이자 노동자인 청년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이마트의 기계실에서 작업을 하던 네 명의 노동자가 냉매가스 유출로 질식해 숨졌고, 그중 한 명은 등록금을 마련하려고 알바를 하던 대학생이었다. 스물두살, 몇년 전 내가 시간강사로 강의를 했던 학교의 학생, 어쩌면 캠퍼스에서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르는. 하청과 재하청의 비정규직 고용 구조에서 책임과 보상마저 미뤄지고 있다는 후속 기사를 읽으면서 내가 칼럼에 썼던 소망이 부끄럽고 슬펐다.
10월에는 쌍용자동차와 케이티(KT)의 구조조정 후 노동자들의 잇단 죽음에 대해 쓰면서 구조조정 살인이라고 불렀다. 그 칼럼을 쓸 무렵은 쌍용자동차 정리해고자 중 17번째 자살이 발생한 때였다. 지금 다시 몇달 지나지 않았는데 희생자는 22명으로 늘었다. 달라진 것은 없고 죽음의 행렬은 계속되고 있다.
칼럼을 쓰고 난 뒤 기쁜 소식을 듣게 된 경우도 없지 않았다. 현대자동차 공장에서 사내하청 직원으로 일하다가 성희롱을 당하고 오히려 해고된 여성 노동자의 오랜 투쟁은 승리를 거뒀다. 신문에도 보도되었듯이 최초의 성희롱 산재 판결을 받아냈고 복직을 이루었다. 파업 후 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음에도 출입국관리소로 끌려가 추방 위기에 처한 베트남 노동자들에 대해 쓴 적도 있다. 이주노동자는 마치 보이지 않는 음지의 그림자인 양 사회적 관심을 거의 못 끌었던 사건이지만, 며칠 뒤 결국 그들이 풀려났다는 친구의 전화를 받고 기뻤다. 약자의 정의도 때때로 승리하고, 조금씩 변하는 것도 있다.
1년 동안 내가 ‘세상읽기’ 난에 쓴 글들을 다시 읽어보았다. 즐거운 얘기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세상을 읽자니 우울한 것투성이다. 노동복지는 척박하기 그지없으며,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노동권을 억압당하고 있다. 멈추지 않는 러닝머신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몸과 정신과 영혼까지 시장에서 팔아야 하고 젊은이들은 헉헉대며 죽어나간다.
그런데 돌이켜 읽으면서 스스로 놀란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내가 어떻게든 희망과 소망을 담으면서 글을 썼다는 점이다. 가끔 내 글을 신문에서 읽은 친구들이 너무 착하고 희망적이라고 혹평했던 것이 이해가 갔다. 내가 이렇게 낙관적인 인간이었다니.
사실은 낙관이라기보다는 ‘이유’다. 내가 글을 쓴 이유, 아무리 암울한 현실이 견고해 보여도 그것을 바꿀 수 있을 거라는 희망. 변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변한 것도 있고, 변해야 할 것도 있다.
내가 무슨 내용으로 칼럼을 쓰든, <한겨레> 기자들이 열심히 기사를 보도하든, 당신이 지금 어떤 것을 선택하고 어떤 일을 하든, 세상은 거의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강물에 떠내려가던 모래 한알 한알이 쌓여 강의 흐름을 바꾸는 것이다. 나로서는 그것이 1년 동안 여기에 글을 쓴 이유이다. 세상을 읽는 것은 세상을 바꾸기 위함이니까.
장귀연 경상대 사회과학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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