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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5.23 19:18 수정 : 2012.05.23 19:18

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

사람 얼굴을 앞쪽, 옆쪽 함께 들이붙인 피카소의 유명한 그림들은 그의 질환 덕분에 태어났다고 보는 연구자들이 있다. 그가 편두통을 겪을 때 실제로 시야에 들어온 모습대로 사물을 그려낸 것이 이 작품들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고통을 통해 사물의 입체적 전체상을 보는 시야를 얻을 수 있었고, 이 시야를 평면적 시각을 가진 다른 사람들에게도 열어준 셈이다.

한 사회에서 진보세력이 담당하는 역할도 이러할 것이다. 진보세력은 사회적 고통을 통해 확보된 입체적 시각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거나 외면하는 현상과 문제들을 눈앞에 제시하고자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고통의 해법까지 제시하고자 한다. 이데올로기적 양분화의 틀 속에서 진보세력의 성장이 유독 힘들었던 한국 사회에서도 진보정당의 필요성이 공감을 얻어왔던 것은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을 정치적 차원에서 드러내고 또 이들을 주체화할 수 있는 정당이 필요하다는 사회적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4·11 총선 결과 발표 직후까지만 해도 통합진보당에 대한 기대는 상당했다. 당원이 아니면서도 이 당에 애정을 가진 사람을 주변에서 자주 보았다. 이는 소위 ‘종북주의’와는 별개인, 사회의 입체적 현실에 대한 관심의 표현이었다. 그런데 한달 만에 이 당은 검찰의 압수수색 대상이 되었고 당원명부까지 압수당했다.

통합진보당에 대한 여론은 분명 악화되어 있다. 비례대표 경선부정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진보정당 내부에서, 그것도 대중의 눈앞에서 드잡이 폭력사태가 벌어진데다, 그 후에도 강경대립만 이어졌으니 말이다. 그동안 검찰이나 경찰이 개입하지 않은 데는 정치적 탄압이라는 빌미를 주지 말아야 한다는 보수세력의 고려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검찰이 본격적으로 개입한 것은, 이쯤이면 동정여론이 별로 강하지 않고, 정치적 순교자를 만든다는 비난도 받지 않을 수 있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다가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나는 한국 진보세력이 정치적으로 책임지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그동안에는 진보세력-정당이 정치적으로 책임질 일이 별로 없었다. 정치적 책임을 진다는 것은 탄압과 박해를 견뎌낸다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일이다. 20세기 사회주의권의 한 학자는, 어떤 혁명가(진보정치인)들은 억압적 구체제하에서 탄압과 고문을 이겨내는 일은 지극히 용감하게 감당했으면서도 정작 기회가 왔을 때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일은 회피한 채 관성적 모습을 보였다고 평가한 바 있다. 정치적 결단은 공중의 지혜에 대한 믿음과 전체 정세에 대한 판단 위에서 내려지며 공공성에 대한 책임감과 윤리의식을 수반한다. 그런데 정치적 결단을 내려야 하는 순간 통합진보당의 어떤 사람들은 공적 정치윤리가 아니라 개인이나 당파가 겪었던 어렵고 힘든 세월에만 집착한 것으로 보인다. 평면적 시야가 입체적으로 확대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점으로 축소되었던 것 같다.

한국 보수세력의 어떤 구질구질하고 전근대적인 면을 비판하면서, ‘제대로 된 보수가 있어야 제대로 된 진보도 가능하다’고 말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한탄하면서 말한다. ‘건강한 진보가 있어야 건강한 보수도 가능할 텐데’라고. 한쪽이 지리멸렬할 때, 긴장감이 풀어진 상대 세력이 얼마나 나태해지고 부패할지 뻔한 일이다. 그런 세력의 지배를 감당해야 하는 사회는 또 얼마나 불행한가. 검찰이 이 기회에 진보세력의 일망타진을 노린다면 그것도 목표를 엄청나게 잘못 설정한 것이다. 오래간만에 많은 의석을 확보한 한국의 진보정당이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정당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많은 사람이 염원하고 있음을, 검찰도 통합진보당 자신도 알기 바란다.

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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