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5.31 19:11
수정 : 2012.05.31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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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삼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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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2월 간사이전력 미하마 원전에서 세관이 파손 절단되어 방사성 물질이 유출되는 사고가 일어났다. 일본 원전업계가 자랑했던 다중보호장치가 무력화되고, 0.7초 뒤에는 체르노빌 같은 대형 참사로 이어질 뻔했던 순간이었다. 자동으로 작동하게 되어 있는 ‘원자로 긴급냉각장치’(ECCS)가 말을 듣지 않았는데, 우연히 베테랑 전문 기술자가 수동으로 조작하여 가까스로 사고를 막아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일본의 원전 기술자 히라이 노리오가 말년에 남긴 편지에 나오는 이야기다.
통일 이전 동독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사고를 막기 위한 최후의 안전계통 6개 중 5개가 기능을 상실하고 남은 1개가 우연하게도 딴 데로 배선이 연결되어 정상적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면 일어났을 대사고를 면했다는 것이다. 일본의 반핵운동가 히로세 다카시의 책 <원전을 멈춰라>에 나오는 이야기다.
체르노빌 사고 당시 원자로 바닥에 핵연료가 흘러내리면서 그 아래 슬래브가 붕괴될 우려가 제기되었다. 슬래브 아래 고여 있는 물과 흘러내린 핵연료가 닿으면 2차 폭발이 일어나 어마어마한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었던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 물은 결국 죽음을 각오한 잠수부가 직접 밸브를 조작하여 빼냈고, 그들은 모두 죽었다. 영국 <비비시>(BBC)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살아남은 재앙-체르노빌>에 나오는 내용이다.
후쿠시마 사고가 일어나기 넉달 전 후쿠시마 4호기는 33년 만에 큰 공사를 하느라 원자로 웰이라는 곳에 물을 가득 채웠다. 여기는 평소에는 물을 넣지 않는 곳인데, 작업원들의 피폭을 피하기 위해서 물을 채웠다고 한다. 이 물은 원래 3·11 대지진 나흘 전인 3월7일에 빼낼 예정이었는데, 작업 공구에 문제가 생겨 그때까지 남아 있었다. 그리고 지진으로 원자로 웰과 핵연료 수조 사이에 균열이 생겨 원자로 웰에 채워진 물이 수조로 흘러가게 되었다. 그 물이 없었더라면 핵연료가 손상되어 일본 열도를 방사능으로 분단시킬 거대한 참사가 일어났을 것이다. <한겨레> 정남구 특파원이 <아사히신문> 기사를 인용한 3월30일치 칼럼에 나온다.
신의 존재를 믿든 믿지 않든, 이런 아찔한 순간들을 생각하면 신의 자비로운 손길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녹색평론> 최근호에 소개된 후쿠시마 원전의 최근 상황을 보면, 신의 자비를 또 한번 기대할 수 있을지 심히 두렵다.
후쿠시마 원전은 지금 방사능이 너무 높아서 1만개가 넘는 사용후 핵연료봉을 안전한 곳으로 옮길 뾰족한 수가 없다 한다. 그런데 지질학자들은 후쿠시마 원전 지하를 진원지로 하는 매그니튜드 7급의 직하형 지진이 일어날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2000도의 붕괴열을 여전히 내뿜고 있는 사용후 핵연료 보관 수조의 건물이 손상되어 있고, 수조가 기울어져 있어 핵연료가 야외에 노출되어 있다. 이런 상태에서 지진이 일어난다면 수조가 붕괴되고, 그나마 담겨 있는 냉각수가 유출될 것이다. 붕괴열에 의해 증발한 물에서 수소가 발생하게 되면 끝내 대폭발로 이어질 것이다.
일본이 드디어 망하는구나, 쾌재를 부를 멍청이도 있을 것이고, 또다시 편서풍 타령을 읊조릴 인간도 있겠지만, 이런 구체적인 정황을 들이밀어도 그저 과민한 인간들의 별스러운 걱정 정도로 치부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지난 몇달 동안 신고리핵발전소에서 만든 전기를 수도권으로 보내는 765㎸ 송전탑 싸움에 끼어들어 고단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나는 이 전대미문의 재앙 앞에서도 ‘원전 르네상스’를 향해 돌진하는 이 나라 위정자들의 배포와 시민들의 무신경에 경악하곤 한다. 이 살얼음판보다 더 아슬아슬한 세상에서 지금 당장 핵발전을 멈추지 않는 이유를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계삼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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