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2.06.04 19:15 수정 : 2012.06.04 19:15

윤석천 경제평론가

초여름의 어스름 저녁. 바람이 신선하니 야외에서 맥주 한잔 하기 딱 좋다. 그렇게 얼큰해질 즈음, 문득 불편해진다. 세상이 영 마뜩잖다.

노인들의 ‘폐지 줍기’가 좀처럼 끝날 줄 모른다. 할머니는 보행기에 의지해 할아버지는 손수레를 끌며 폐지와 고물을 줍는다. 저쪽에선 한 무리의 노인들이 열을 지어 고단한 발걸음을 재촉한다. 이유를 물어보니 근처 교회에서 주는 동전 한 닢을 얻기 위해서란다.

현실이 이처럼 누추한데도 복지 얘기만 나오면 한국의 기득권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다.

“유럽과 일본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일하기 싫어하고, 나라의 복지를 많이 기대하는 점 때문에 경기를 어렵게 만든다.”

한국 최고의 재벌이 한 말이다. 이 말을 현지인이 들었다면 기가 막힘을 넘어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의문이 생긴다. 그는 왜 이런 발언을 공개적으로 했을까? 외교적 수사를 거두고 거친 표현을 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 복지도 마찬가지다. 높은 수준의 복지를 이루려면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 이 말은 누군가는 세금을 더 내야 한다는 걸 뜻한다. 그렇다면 누가 더 내야 할까. 부자가 더 부담해야 한다. 간접세를 올려 재원을 충당하는 방식이라면 ‘복지’라 할 수 없다. 진정한 복지는 ‘소득 재분배’ 효과를 동반해야 한다. 복지 시스템이 잘되어 있는 나라일수록 직접세의 비중이 크다. 부유층이 많이 부담한다.

이러니 복지 얘기만 나오면 기득권이 쌍심지를 켜는 것이다. 걸음마 단계인 복지/경제민주화의 싹을 아예 꺾어버릴 의도이다. 세금 부담이 싫으니 나라가 망할 것이란 협박도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게 있다. 복지야말로 신선한 성장동력임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자신들에게도 결코 손해가 아님을, 오히려 이득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더이상 생산과 축적을 미덕으로 하지 않는다. 이것으론 체제를 유지할 수 없다. 생산에 주력한 산업자본주의는 ‘과잉생산’ 시대를 낳았다. 그러니 이젠 소비가 화두인 시대이다. 현대의 일상적 소비는 낭비와 사치임이 분명하다. 그래도 그게 없다면 자본주의는 지속 불가능하다. 넘치는 생산물을 처리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현대 경제는 빚을 줘가면서까지 소비를 부채질한다. 문제는 신용을 무한 공급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작금의 위기가 이를 증명한다. 부풀려진 신용의 폭발, 그것이 현 위기의 실체이다. 이대로 가면 자본주의는 붕괴한다.

방법은 없는 걸까. 있다. 과소 소비가 원인이니 소비자의 가처분소득을 늘려 소비를 하게끔 하면 된다. 구체적으로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고용확대/임금인상 그리고 복지 확대가 바로 그것이다. 전자의 미래는 어둡다. 기술 혁신이 인간의 노동력을 점차 산업현장에서 몰아낼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산업발전에 따른 필연이다. 그러니 남는 건 복지 확대뿐이다. 이를 통해 소비자의 가처분소득을 강제로라도 늘려주어야 한다. 이것만이 과잉생산 시대의 과소 소비 문제를 해소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침몰을 막을 수 있다.

남유럽이 복지 때문에 곤경에 처한 것은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그러나 무분별한 복지 포퓰리즘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세금 제도의 개혁 없이 재원도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북유럽을 무리하게 흉내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기득권의 분배에 대한 인식 부족과 공존에 대한 의식 결여가 위기의 진짜 원인이다.

복지는 망국을 부르지 않는다. 오히려 신선한 성장동력이다. 자본주의의 붕괴를 막고 공멸을 피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대안이다. 단, 소득 재분배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기득권은 기꺼이 그 부담을 져야만 한다.

윤석천 경제평론가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세상읽기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