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2.06.12 19:08 수정 : 2012.06.12 22:26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어김없이 6월10일이 다가왔다 지나갔다. 자욱한 최루탄 연기 속에 울려 퍼지던 독재타도·호헌철폐라는 구호는 어느 대학 학생회관에 박제된 채 걸려 있는 이한열의 걸개그림 속에서만 숨가쁘게 퍼덕이는 역사가 되어 버렸다. 어떤 사람들이 부인하고 지우고 싶어하는 그 그림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성화로 남아 있어야 한다. 전자는 ‘역사 없는 기억’을 구성하고 싶어하고, 후자는 ‘기억 없는 역사’에 비통해한다.

그러나 전자나 후자 모두 ‘특정 시기’를 물화하고 존재의 의미를 각인시키는 도구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들은 복귀되어야 할 고귀한 가치가 과거의 어느 시기에 ‘진정’ 존재했던 것처럼, 순수하고 대단한 실재적 모델이 과거 어느 시기에 있었던 것처럼 착각한다는 점에서 모두 퇴행적이다. 두 집단은 서로 상반된 두 시기를 도구적으로 대명사화하고, 집단적 정체성 (재)구성과 유지를 위해 상대방을 증오의 대상으로 상정한다는 점에서 거울상이다. 이들은 쌍방간 적개심을 집단적 기억으로 재구성해야만 존재의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적대적 공존관계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필연적 운명에 놓인다.

집단적·배타적 기억을 생산·유지하기 위해 두 집단은 다음과 같은 시행세칙들을 지닌다. 첫째, 과거에 고착된 보편적 가치라는 상징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가치들을 무시하거나 부차적인 것으로 전제한다. 둘째, 내부의 다양성, 때로는 충돌하고 경합하는 수많은 이야기들은 간단히 기각하거나 억압한다. 셋째, 개인은 ‘회고적 발전’이라는 형용모순의 유지를 위해, 신화적 의미의 ‘우리’를 구성해내기 위해 도구적으로 활용할 뿐이다. 넷째, 가상의 동질화된 타자를 생산하고 이들에 대한 적대감을 끊임없이 추동해냄으로써 ‘우리’라는 존재의 의미를 획득한다. 이로써 ‘미래’는 ‘과거’의 시간에 식민화되며, 나는 ‘우리’에 포섭되거나 배제되고, ‘가야 할 길들’은 오로지 하나의 공동체, 하나의 집단적 의식과 행동이라는 신화적 믿음을 통해 하나로 수렴된다.

그러나 우리가 목도해왔고 역동적으로 체화한 모든 변화들을 신화화된 어느 한 시대에 집중시키는 것은 역사에 대한 희극적 왜곡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자학적 조롱이다. 때로는 아버지와, 때로는 형님과, 때로는 동지와 동일시하면서 종내는 스스로를 그 사람이라 착각하는 것은 편집증과 피해망상에 다름 아니다. 이들이 환기하고자 하는 역사는 연결되지 못하고 단절되며, 각각의 주체들은 굴절된 시·공간에 변별적으로 놓인다. 그러므로 폭력적이며 자기파괴적인 결과는 이 역사드라마에서 어쩌면 숙명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그 지긋지긋한 집단적 퇴행의 드라마를 끝장내고 접속의 연대라는 새로운 드라마를 시작하자. 다르지만 가로지를 수 있는 용기와 열정을 가진 ‘나’들 간의 만남을 구상하고 만들어가자. 이때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민주주의의 가치와 신념, 행위양식들,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공간이 복잡한 사회적 관계에 의해 구성된 것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특정한 정치·사회·문화·역사(시간)라는 맥락에 위치지어진 살아있는 주체들의 몸에, 마음에, 의식에 여러 겹의 층위로 모순적으로 배태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는 성취의 대상이라기보다 끊임없는 협상과 투쟁을 통해 재구성되는 ‘과정’이다.

그 긴 여정의 과정에서, ‘다른’ ‘우리들’이 다양한 지점에 서 있되 한곳을 바라볼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행동할 때, 세상은 비로소 새롭게 떠오르는 2013년의 해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세상읽기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