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6.21 19:23
수정 : 2012.06.21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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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삼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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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의 기대수명을 따르자면 나의 생몰 연대기는 20세기 후반기에서 21세기 전반기 어느 지점에 그어질 것이다. 이 짧고 유한한 시간을 살아가게 될 내가 학습을 통해 체득한 세상에 대한 바람이란, 이를테면 20세기 전반기 세계를 휩쓸었던 전쟁과 살육, 그리고 파시즘 체제를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것 정도일 것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진보된 세상에 대한 희망도 조금씩 접혀간다. 더 나빠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자식에게 파국을 물려주어서는 안 된다는 책임의식 정도가 내 정치적 자의식의 대강이다.
학교폭력으로 징계받은 아이들을 공립형 대안학교에 모아 놓고 감옥체험을 시킨다. 학교폭력에 관한 징계기록을 학교생활기록부에 남겨 ‘빨간 줄’을 긋는다. 말 잘 듣는 ‘범생이’들을 선정해서 교내와 피시방, 노래방과 학원을 순찰하게 한다. 이런 따위 발상이 난무하는 속에서 학교는 아주 짧은 시간에 가해자와 피해자, 감시자와 징벌자로 구성된 경찰체제로 돌변해 버리고 말았다. 시시티브이가 없을 때는 무서워서 어떻게 살았을까. 그동안에는 경찰 없이 어떻게 이 무서운 아이들을 통제했을까.
폭력을 폭력으로써 다스리면 작은 폭력은 반드시 뿌리로 내려가 존재를 옴짝달싹 못하도록 묶어버린다는 사실이 그렇게 오묘하고 어려운 진리인가. 학교폭력 피해자들의 심리치료를 의무화한다고 한다. 아이가 치료의 대상자가 됨으로써 아이는 타인으로부터 낙인찍히고, 스스로를 병리적인 존재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폭력을 야기한 큰 그림 속에서 자신을 위치짓기보다 자기 자신의 감정과 싸우게끔 문제설정이 왜곡되어 버릴 것이다.
교육이 교육일 수 있는 이유는 폭력에 대한 즉물적인 대처가 아니라, 그래도 저 어른들보다 아이들이 반성하고 돌이킬 수 있는 가능성이 더 큰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설령 반성과 돌이킴이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진 아이라도 그들이 아이이기 때문에 지켜주고 기다려주어야 하는 것이다. 피해자의 고통은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그리고 폭력이 야기된 관계 속에서만 치유될 수 있다. 그 시간과 여유를 허락하고, 그것을 사회 전체가 감당하자는 약속이 있을 때 교육이 성립한다.
그러나 이런 기대와 기다림을 헌신짝처럼 폐기하면서, 감시와 처벌을 제도화함으로써 교육체제를 사법화하고, 사회를 경찰국가화하면서 달려가는 곳은 어디일까. 그것은 파시즘 사회다. 타인을 보지 못하는 사회, 생존을 위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사회, 희생자의 고통에 공감하기는커녕 ‘당할 만한 이유가 있는 놈’으로 믿어버리는 사회, 그래야 자기가 살 수 있는 사회, 자기기만과 외면의 사회.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 있어서 이 글을 쓴다. 대구교육청에서 학교마다 창살을 20~50㎝만 열 수 있도록 고정장치를 달도록 했다고 한다. 자살방지대책의 일환이라고 한다. 막막할 때, 바깥세상으로 숨통을 틔워주었던 창, 다른 세상의 은유로서의 창, 저들에게 창의 정서적인 역할, 문학적인 의미까지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교실마다 거의 일년 내내 돌아가는 에어컨과 히터로 찌든 실내 공기를 하루에 몇 번씩은 활짝 열어 환기를 해야 아이들의 호흡기를 그나마 건사할 수 있다는 생물학적 의미만으로도 이번 조처의 황폐함을 지적하기에는 모자라지 않다.
정신치료를 받아야 할 것은 아이들이 아니라 학교다. 다른 곳은 모르겠고, 어쨌든 학교에서만큼은 죽지 말아 달라고 창을 닫아버리는 폭거를 자살방지대책이라고 내놓는 교육당국이 치료 대상이지 학생은 아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조처를 단칼에 무찔러버리지 못하는 우리 사회가 문제이지, 결코 아이들은 아니다.
이계삼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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