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2.06.24 19:19 수정 : 2012.06.24 19:19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스스로를 소개할 때 “나는 잉여입니다”라고 말해본 적이 있는가. 없다면 당신은 아마도 40대 이상이고, 앞만 보는 삶을 살아왔을 가능성이 높다. 당신이 학생이었을 때 자기소개를 하라고 하면 십중팔구 “어느 학교 몇 학년 아무개입니다”라고 소개했을 것이고, 성인이 되어 직장을 가지게 된 후라면 “어느 회사 무슨 직급 아무개입니다”라고 소개했을 것이다. 자신이 속한 조직과 그 조직 내의 위계에서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말하고 나면 당신의 정체성은 거의 완성된다. 그다음에 스스로에 대해 무엇을 말해야 할지 잘 모르는 것이 보통이다. 나의 정체성에서 내가 차지하는 부분이 워낙 작기 때문에 개인의 자유나 권리에 그다지 민감하지 않다.

지금의 20~30대에게 ‘잉여’는 정체성의 자연스런 한 부분이다. 학생은 더이상 “어느 학교 몇 학년”이 아니라 “공부하는 잉여”이고, 일하는 젊은이는 “알바 뛰는 잉여”쯤 된다. 우리가 만들어놓은 세상에 들어가지 못하고 남아도는 그들에게, 한가로운 것과 일하고 싶어도 아무도 시켜주지 않는 조바심 사이의 경계선은 촘촘하다. 그래서 그들은 한없이 ‘잉여롭다’.

그런데 그 잉여들은 기성세대보다 못해서 잉여가 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단군 이래 가장 많이 공부하고, 제일 똑똑하고, 외국어에도 능통하고, 첨단 전자제품도 레고블록 다루듯이 만지고… 악기 하나쯤은 다룰 줄” 아는, 그러니까 “부모 세대는 그중에서 단 하나만 잘해도, 아니 비슷하게 하기만 해도 평생을 먹고살 수 있었”던, 그런 사람들이다(김영하 소설 <퀴즈쇼> 중에서). 다른 말로 그들은 기성세대에 비해 월등한 인적자본과 문화자본을 가졌으며, 상식과 인권에 예민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어쩌랴, 한국 경제는 성장해야 하니까 노동은 유연해야 하고, 따라서 (어쩐지 그들에게만 유난히) 비정규직은 당연시‘되고’, 그들은 무급 인턴이라도 성실히 노력하길 기대‘당한다’. 한국 사회의 단단한 껍질 바깥에서 남아도는 그들에게 ‘조직’이나 ‘위계’ 따위가 정체성의 한 부분을 이룰 리는 만무하다. 다른 한편으로 집단 정체성 과잉의 한국 사회에서 그들의 존재는 어쩌면 희망이기도 하다. 어차피 속한 곳이 없는 그들에게서 ‘나’를 빼면 정체성은 없다.

만만하게 보면 안 된다. 기댈 곳이 없는 잉여들의 ‘나’는 자기가 속한 조직과 배경을 믿고 큰소리치는 기성세대들의 ‘나’보다 훨씬 단단하고 여물다. 그들의 능력과 문화적 취향과 국제화된 감각이 뿜어져 나오는 순간, 이 세상이 영원히 자기들 것인 줄 착각하고 있던 기성세대의 큰소리는 순식간에 ‘꼰대질’로 전락한다. 이것이 곧 ‘잉여력’이다.

잉여의 감수성으로 한번이라도 세상을 보자. 새누리당에서 벌어지고 있는 종북놀음과 충성경쟁은 영락없는 꼰대질이지만, 그건 그냥 ‘구릴’ 뿐 언급할 가치도 없다. 문제는 야권 주자들조차 지역구도나 따지고 있거나, 어정쩡한 정책으로 잉여들을 배제하거나 혹은 두루뭉술 묻어가려 한다는 점이다. 도대체 왜 잉여 따위에 신경 써야 하는지 알고 싶다면 지난 19일 선관위가 발표한 19대 총선 투표율 자료를 보라. 18대에 비해 20~30대 투표율은 10%포인트 이상 일제히 상승했지만 50~60대 투표율은 2~3%포인트 오르는 데 그쳤다. 더구나 20~30대에서는 이번에 오른 만큼 또 한번 상승할 공간이 남아 있지만 50~60대 투표율은 거의 포화상태이다. 잉여력이 세상을 바꿀 준비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옳다. 잉여가 세상을 바꾸었을 때 비로소 잉여는 더이상 잉여가 아니라 한국 사회라는 체제의 한 주역이 될 테니 말이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세상읽기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