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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7.03 19:15 수정 : 2012.07.03 19:15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어렵사리 표를 구했다. 서울시 전체 상영관 중 2곳에서 하루 평균 1~2회 상영하는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평상시와는 다른 불굴의 의지가 필요하다. 그 흔한 복합상영관의 안락한 의자와 달리 푹 꺼진 의자와 앞좌석에 가려진 스크린. 덕분에 영화 보는 내내 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한겨울 칼날 같은 추위를 뚫고 용광로처럼 솟아오르던 2009년의 용산은 망각의 얼음 늪에 빠져 있던 내게 다시 고통스러운 불꽃이 되어 다가왔다.

<두 개의 문>은 2009년 1월19일과 20일 사이, 용산의 25시간을 환기하는 영화이다. 영화를 제작한 김일란 감독은 “용산참사의 진실을 향한 ‘두 개의 문’이 다가와 있다. 하나는 ‘진실의 문’이고 다른 하나는 ‘망각의 문’이다”라고 밝혔다고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하나의 문을 향한 두 개의 시선, 하나의 권력에 희생당한 두 집단이 마주한 공포를 다루고 있다고 느꼈다. 옥상 망루로 향하는 두 개의 문 앞에 선 어찌할 바 모르는 경찰 특공대원들이 마주한 공포,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 앞에 화염병의 섬광으로밖에 표현할 언어를 갖지 못한 철거민들이 느꼈을 공포.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그들은 모두 살고자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영화는 과잉된 감정으로 이들을 희생자화하지도 열사화하지도 않은 채 폭력적 가해자/무기력한 피해자의 이분법적 프레임을 넘어 프레임 바깥에 서 있는 권력에 대해 질문한다.

이 정권 들어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사회적 공포의 확산이다. 정체 모를 불안감이 사회·문화적으로 확산되고 순환되어 재생산되는 공포. 누가 다음 대상이 될지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서 거대한 권력 앞에 무기력하게 순응할 수밖에 없는 소시민들의 좌절이 공포를 증폭시켜 왔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사회·문화적으로 만들어지는 2차원적 공포를 ‘파생적 공포’라 명명한 바 있다. 자신이 위험에 빠지기 쉽다고 느끼는 감각이 계속해서 마음을 구획하는 프레임으로 작동하는 현상으로서의 공포는 불안의 감각, 취약함의 감각을 통해 자가발전된다. 이로써 대다수의 대중은 위험의 실체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압도되어 꼼짝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두 개의 문>은 어렴풋하게나마 공포의 실체를 조명한다.

국가는 통상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을 존재 이유로 하기 때문에 국민의 복종을 요구한다. 하지만 보호의 대상이 특정 집단일 때, 그리하여 대다수 국민의 안전에 대한 보장이 불가능할 때 등장하는 것이 ‘악마 가설’이다. 이제 선량한 시민들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우리 사회 곳곳에 숨어 있는 악의 세력을 척결하는 것이 국가의 임무가 되고, 대테러용으로 만든 특수경찰관은 국가체제를 수호하고 악의 세력을 척결하기 위한 정당한 방어수단이 된다. ‘사회질서를 교란하는 자’ 혹은 ‘종북세력’이라는 그 흔한 딱지는 악마 가설을 유지하게 하는 상징조작의 산물이자 사회적 공포를 재생산하는 주요 기제로 작동한다.

그렇다면 삶을 위해 공포에 떨다 ‘개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 그리하여 죽음마저 애도되고 기억될 수 없는 이들은 악의 세력인가. 이들에게 국가는 있는가?

우리는 모두 닫으면 망각이 되고 열면 진실과 맞닿는 하나의 문 앞에 망설이며 서 있다. 그저 무기력하게 문을 닫고 충분한 애도의 시간조차 갖지 못한 채 슬픔을 가슴에 묻을 것인가, 아니면 과감히 문을 열고 들어가 진실의 빛을 향해 전진할 것인가. 영화는 후자를 선택하라고 속삭이는 것만 같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약자의 희생을 끊임없이 강요하는 이 슬픈 국가 안에서 영원히 우울증에 시달려야만 할 터이니.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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