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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7.04 19:27 수정 : 2012.07.04 19:27

조광희 변호사

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 슬라보이 지제크가 지난주 내한했다. 그는 두 차례에 걸친 강연을 마치고 쌍용차 해고노동자 분향소를 방문한 뒤 한국을 떠났다. 그의 책은 1995년부터 한국어로 출간되기 시작하여 현재까지 수십권이 출간되었다. 철학이나 정신분석학에 정통한 사람들에게는 독특한 지적 즐거움과 영감을 주지만 나와 같은 문외한이 그의 책을 읽는 것은 솔직히 고행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최고의 수면제는 철학책’이라는 오랜 신념으로 그의 책을 대부분 구입했지만, 그에 대해 5분 이상 말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자백한다. 그러나 그토록 많은 시간을 들이고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그다지 부끄럽지는 않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불철주야 지키는 훌륭한 사람들 중에도 그를 이해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환경단체인 그린피스 관계자의 입국도 가로막을 만큼 서슬이 시퍼런 그들이 지난주에 남한에 있던 생물 중에 금붕어를 제외하고 가장 빨갛던 그의 입국을 막거나 체포하지 않았다.

그의 책을 읽어보기는커녕 이름도 못 들어본 게 분명하다. 빨갱이일지라도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거나 사상가로 명성을 떨쳐 세속적으로 성공하는 경우에는 한없이 관대해지는 그들의 독특한 성향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강연에는 수천명의 청중이 몰렸다고 하는데,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존중하느라 이 불온한 좌빨들에 대해 어떤 조처도 취하지 않은 수사기관의 자제력은 칭송받아 마땅하다.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는 것을 정말 오랜만에 실감했다고나 할까.

강연 내용과 분위기에 대해서 여러 기사가 있었고 트위터로 생중계되기도 했으므로, 현장에 가지도 않았을뿐더러 그의 사상을 충분히 이해하지도 못하는 내가 왈가왈부할 것은 아니다. 강연 이외에 그의 내한 당시 몇 가지 언행도 입길에 오르내렸는데, 그중 백미는 강연의 사회를 맡은 교수의 트위트로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인천공항에 가본 사람들은 ‘공 위에 커다란 당근을 얹은 것’처럼 생긴 거대한 은빛 조형물을 기억할지 모르겠다. 입국 후 공항을 빠져나오던 지제크는 그 조형물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왜 히틀러의 거시기가 저기에 있는 거야?” 그 교수의 전언에 따르면 히틀러의 고환이 하나라는 전설이 있었다고 한다. 마르크스의 사상과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두 기둥으로 하는 그의 사회비판적 시각과 유머가 넘치는 표현방식을 이보다 잘 드러내기는 어려웠으리라. 어쩌면 대한민국은 나라의 현관 앞에 히틀러의 거대한 거시기를 자랑스럽게 전시하고 있는 또다른 의미의 ‘남근주의적 전체주의 국가’일지도 모른다.

그의 방한은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이클 샌델이나 <노동의 종말>의 저자 제러미 리프킨의 최근 방한과는 구별되는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지제크가 유사파시즘적일 뿐만 아니라 신경쇠약 직전인 대한민국에 사느라 지친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영감은 훨씬 근본적일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나와 같은 문외한이 서구의 역사적 경험과 철학 그리고 언어를 바탕으로 하는 그의 사상을 그의 책을 통해 직접 소화하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나는 ‘언어의 유희’가 아닌 ‘현실의 사상’은 일반인들에게도 그 핵심이 일상적인 언어로 전달될 수 있으며, 만일 그럴 수 없다면 교묘한 ‘지적 사기’일지 모른다고 의심한다. 그리고 사상을 쉽게 전달하는 역할이 지식인의 몫이 아니라면 누구의 몫이겠는가.

조만간 슬라보이 지제크를 수면제가 아닌 각성제로서 만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대해본다.

조광희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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