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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7.10 19:12 수정 : 2012.07.10 19:12

진중권 동양대 교양학부 교수

<두 개의 문> 개봉으로 심기가 불편했나 보다. 김석기 전 서울경찰청장은 용산참사의 희생자 중에 경찰도 포함돼 있음을 지적하며 “다시는 반복되지 말아야 할 비극이지만 경찰의 법집행을 공권력의 횡포로 몰아가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단다.

그의 말 속에서 참기 어려운 것은 참사로 희생된 특공대원을 슬쩍 자신과 동일시하는 그의 태연함이다. 그의 논리는 이런 것이리라. ‘나와 특공대원은 모두 경찰가족이다. 용산참사에서 경찰도 희생자였다. 고로 나 역시 넓은 의미에서 희생자 가족에 속한다.’

과연 그럴까? 사실을 말하면, 남일당 건물 위 망루 속에 가해자는 없었다. 특공대원이 철거민들에게 희생당한 것도 아니고, 철거민이 특공대원에게 희생당한 것도 아니다. 망루 속의 철거민과 특공대원이 공히 그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어떤 힘에 희생당한 것이다.

철거민들이 망루에 인화물질을 들여놓은 것은 결코 가해나 자해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시너통은 자신들의 분신에 쓸 연료가 아니었고, 화염병은 특공대원의 소사(燒死)를 노린 무기가 아니었다. 그저 경찰의 접근을 막아 농성을 연장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다.

접근을 위험하게 만듦으로써 접근을 막겠다는 생각. 그런 의미에서 치명적 ‘위험’은 예기치 못한 변수가 아니라, 대비해야 할 상수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재판 과정에서 드러난 것은 경찰이 망루 안의 상황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왜 그랬을까? “시민의 안전”을 위한 조처였단다. 경찰이나 용역이 접근할 때마다 새총으로 골프공을 쏘는 게 그토록 긴급한 상황이었을까? 3년이 지나도록 빈터로 남아 있는 남일당 건물 터는 우리를 더 허탈하게 만든다. 고작 공터로 쓰기 위해 그 참극을 치렀단 말인가.

왜 그렇게 서둘러야 했을까? 그토록 진압이 하고 싶었다면, 그저 건물을 포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 게다. 엄동설한의 추위에 물이나 음식마저 떨어진다면, 그들이 그 허름한 망루 안에서 버텨봐야 얼마나 더 버티겠는가. 길어야 일주일을 넘기지 못했을 게다.

그랬다면 물론 영화 속 누군가의 대사처럼 “영화의 한 장면”은 없었을 게다. 그래서일까? 경찰 수뇌부는 농성자들이 스스로 지쳐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인내심보다는 특공대의 작전으로 철거민이라는 이름의 테러리스트들(?)을 검거하는 전격전을 선택했다.

단호하고 신속한 진압의 필연성은 없었다. 그런 필연성이 존재했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 미학적 성격의 것이리라. ‘보시기에 좋았더라.’ 아마도 그쪽이 어느 분의 눈에 보시기에 더 좋았을 게다. 당시 각하는 이른바 ‘떼법’에 ‘무관용의 원칙’으로 대응하라고 주문한 바 있다.

발화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법정의 영감님은 철거민들을 가해자로 지목했다. 판결 자체도 카프카의 소설만큼 부조리하지만, 애초에 망루 안에서 가해자를 찾는 것 자체가 부조리한 일이다. 진짜 가해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망루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철거민들에게는 죄가 없다. 그들은 죽으려 하지도 않았고, 죽이려 하지도 않았다. 특공대원들에게도 죄가 없다. 그들은 거대한 기계의 부품처럼 전체 기제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맡겨진 임무, 내려진 명령을 미련하도록 성실히 수행했을 뿐이다.

자본의 게걸스런 욕망(‘재개발 프리미엄’), 그 욕망을 집행하는 정치(‘무관용의 원칙’), 그 정치에 충성하는 사욕(‘경찰청장 내정’), 이것이 참사를 낳은 살인기계의 구조다. 법원은 이 기계의 원활한 작동을 보장하는 번지르르한 윤활유라 볼 수 있다.

아, 참극을 빚은 ‘무관용의 원칙’의 원조는 박근혜가 내건 ‘줄푸세’ 공약의 세번째, ‘법질서 세우기’였다.

진중권 동양대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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