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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7.17 19:15 수정 : 2012.07.18 11:07

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오랫동안 못 만난 지인의 안부가 문득 궁금해서 문자를 보냈다. “어떻게 지내세요?” “아직 멘붕이죠.” 며칠 뒤 친구와 채팅을 하다 정치 얘기가 나와서 물었다. “네가 보기엔 어때?” “아놔, 멘붕이야.” 가히 ‘멘붕의 시대’라 할 만하다. 술자리에서, 페이스북·트위터에서, 신문기사 댓글에서 온통 멘붕이다.

멘붕도 종류가 여러 가지다. 필자의 지인들이 호소한 건 정치 때문에 생긴 속병, 폴리 멘붕이다. 많은 사람들이 계속 앓고 있으니, 만성 집단 멘붕이기도 하다. 멘붕은 멘탈이 붕괴된 것이므로 치유와 재건은 선택이 아니라 절박한 요청이다. 더구나 일시적, 국부적 증상이 아니라 원인이 깊고 붕괴 상태가 지속된다면 더욱 그러하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힐링이 시급하다.

멘탈 붕괴는 내적 문제가 누적되어 급기야 인지불능, 결단불능, 행위불능의 지경에 이르게 된 상태다. 기본적으로 마음의 병이지만, 나아가 행동능력을 상실하게 되는 치명적 증상이다. 우리는 그냥 놀람, 충격, 절망 때문에 무너지지는 않는다. 이제까지 당연하고 익숙했던 상식과 습성으로 도저히 해석하고 반응할 수 없는 어떤 상황에 놓일 때, 멘탈은 붕괴한다. 오늘의 폴리 멘붕은 어디서 왔는가?

야권 지지자들의 멘붕에 질적인 변화가 있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멘붕은 당연 엠비 멘붕이었다. 대통령과 현 정권 때문에 속병이 났다. 상식으로 생각해온 민주주의와 기본권, 정부의 공적 책무를 뻔뻔하게 내팽개치는 모습에 경악했다. 올해는 다르다. 김용민 파동, 이정희 사퇴, 총선 패배, 통합진보당 사태에 이르기까지, 야권 정치의 문제로 생긴 멘붕의 연쇄다. 외인성에서 내인성으로 바뀌었다.

촛불 시민은 멘붕 시민이 됐다. 시민들은 ‘우리’ 안에서 ‘그들’을 보는 충격을 경험했다. 그들에게 일어났어야 할 일, 그들의 악이라고 여겨온 일이 우리 안에서 터졌다. 우리와 그들의 위치가 뒤바뀌었다는 것, 이것이 지금 야권 전반이 처한 멘붕의 핵심이다. 야당은 국민의 심판을 받았고, 선거부정에 휘말렸고, 폭력에 무감했고, 불통의 벽을 세웠고, 그들만의 권력투쟁에 몰두했고, 보수진영에 젊고 혁신적인 어젠다와 아이디어를 빼앗겼다. 왜 이렇게 됐나?

이 시대의 문제는 거울상이다. 이명박 정권은 실로 최악이었다. 최악의 정권은 야권의 시선을 그 수준에 맞춰놓았다. 야권은 증오와 조롱의 정치로 자기 할 일을 다 했다고 착각했다. 그러는 가운데 무엇인가가 텅 빈 채 남아 있었다. 그곳이 썩은 곳이다. 부정의 정치는 단지 대안이 결여된 절반의 정치라는 문제만 있는 게 아니다. 현존하는 권력이 악이기 때문에 그 권력만 찬탈하면 된다는 믿음은 스스로를 시들고 병들게 한다.

선악의 이분법 속에서 악이 아닌 모든 것은 선이거나 사소한 악인 것처럼 왜곡된다. 적을 악마화함을 통해 아를 정당화하는 적대적 공존의 메커니즘이 고착된다. 아의 선함은 자명하기 때문에 필요한 것은 오직 권력의지뿐이라는 위험한 사고가 팽배한다. 쟁취한 권력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사라지고 정치기술자들의 이른바 산토끼 사냥술만 발달한다. 집권이 절대선이 됐다.

‘심판’이라는 슬로건은 이런 내적 공허를 장엄미 넘치는 외투로 가리려 한 헛된 시도였다. ‘연합’은 자기혁신 없이 집권을 넘볼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오직 집권이 문제라는 사이비 현실주의는 지금 야권을 권력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게 만들고 있다. 계속 계산기만 두드릴 것인가? 나라 정치의 근본가치와 노선을 우렁차게 논하는 굵은 목소리에 목마르다. 힐링은 ‘우리’의 정치적 실체를 다시 채우는 일로 시작된다.

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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