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7.19 19:19
수정 : 2012.07.19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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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근 쌍용자동차 해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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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을 펼치면 쌍용차 관련 뉴스를 찾으려고 습관처럼 사회면부터 먼저 본다. 3년이 지난 오늘 이 습관은 손에 밴 군살처럼 굳어졌다. 사회면을 읽은 뒤 칼럼과 사설란으로 넘어가는 게 나의 신문 보는 순서다. 그날도 이런 순서로 신문을 보고 있었는데, 눈에 띄는 기사 하나가 시선을 잡아당겨 손가락에 더는 침을 묻히지 않게 했다. ‘화성연쇄살인사건’에 대한 기사였다. 영화 <살인의 추억>의 장면을 떠올리며 새로운 내용이 있나 싶어 살펴봤다. 2006년 4월2일에 발생한 마지막 10차 사건의 15년 공소시효가 만료됐음에도 범인을 다시 잡겠다고 나선 경찰관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정말 범인을 잡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진 채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은 10명의 부녀자가 4년7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그야말로 감쪽같이 소멸된 희대의 사건이다. 그러나 범인 검거는커녕 사건의 실체는 미궁에 빠져 영화 속 하수구 어디쯤에 있다.
범인 검거를 위해 공소시효 소멸시점까지 군경 205만여명이 동원돼 화성 일대에는 탐침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또한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돼 조사받은 사람만 2만1280명이었다. 여기에 4만116명은 지문을 뜨였으며, 180명의 머리카락은 범인 검거를 위한 제단 위에 강제로 뽑혀 올려졌으나 범인의 털끝 하나 찾아내지 못했다. 이 사건을 두고 한편에선 과학수사의 필요성을 제기했고, 다른 한편에선 검경의 민생치안 불안과 무능을 말하기도 했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처럼 범인은 그 어떤 단서도 남기지 않았다. 우연처럼 ‘비 오는 날’만이 이 사건의 범인을 추정하고 추적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라면 단서였다. 영화적 장치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단서는 없었다. 처음부터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단서가 이 사건엔 존재하지 않거나 찾을 수 없는 영역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 분명한 ‘단서가 있는’ 사건이 있다. 어느날 멀쩡하던 사람이 죽는다. 이 죽음이 스물두번째까지 이어진다. 고향은 제각각이었고 나이 차도 컸다. 성도 달랐고 이름도 달랐다. 남은 가족은 물론 문상객 수도 달랐다. 2009년 5월 쌍용자동차에서 함께 근무했다는 점만 빼곤. 또 한 가지 닮은 게 있다. 속이 타들어갔기 때문일까, 죽어서도 검은 얼굴의 영정만을 남겼다는 점이다. 해외매각 만능주의에 빠져 무조건 팔아넘겨야 한다는 오만한 관료들의 도도한 결재가 낳은 버섯구름의 재앙이 노동자의 얼굴에 낙진으로 남는다. 그때의 낮게 뜬 경찰특공대 헬기 소리는 어른 아이 가릴 것 없이 달팽이관 속 보청기가 되어 소리 공포를 증폭시킨다. 인간 존엄은 똥오줌과 뒤섞인 채 짓밟혔고 수치심은 돼지우리 속에 처박혔다. 그라인더 자국 선명한 진압용 컨테이너 박스는 날짐승의 피부와 발톱을 경험하게 했다. 포획당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악몽 같은 시간을 3년이나 보냈지만 새벽이면 어김없이 삶과 죽음의 경계가 얇아지는 것을 느낀다. 술로 잊고 약물로 버티지만 혈관 따라 흐르는 그날의 기억은 분해되지 않고 오히려 응고된다.
죽음의 단서가 명백하고 가해자가 또렷한 이 사건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이 사건의 공소시효는 언제까지인가. 이보다 단서가 차고 넘치는 사건이 또 어디 있는가.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이 이상 더 무슨 단서를 찾고 제시해야 하는가. 영화 장르 가운데 미스터리는 관객을 사건 해결에 동참시키고 스릴러는 사건의 당사자로 만들어간다. 미스터리가 ‘왜’ 살해당했는지를 주목한다면, 스릴러는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주목한다. 그렇다면 쌍용차 사건은 어떤 장르에 속하는가.
이창근 쌍용자동차 해고자 트위터 @nomadch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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