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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7.22 19:19 수정 : 2012.07.22 19:19

권영숙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 선임연구원

이명박 대통령이 7월18일 ‘비상경제대책회의’에서 이런 말을 했다. 금융노조, 현대자동차노조 등의 파업 움직임과 관련해 “고소득 노조가 파업을 하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다”고 언급한 뒤, “정말 어려운 계층은 파업도 못한다”고 말했다. 앞의 사실무근은 차치하고, 일단 그도 알긴 아나 보다, 한국에서 ‘파업’을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하지만 과연 얼마나 제대로 알까.

바로 노동권이란 자본주의사회에서 자본에 비대칭적인 권력관계에 놓인 노동자들에게 특별히 부여되는 시민적 권리라는 것을, 그리고 노동권이란 바로 노동자에게만 노동자이기에 부여되는 ‘시민적 권리’라는 것을. 그리고 노동권은 노조를 결성하고 단체교섭을 하는 것을 넘어 단체행동, 즉 ‘파업’권 확보를 통해 완성된다는 것을. 그리고 한국의 ‘87년 헌법’ 역시 한국의 노동자들에게 노동의 시민권인 노동권을 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또 아는지. 이 땅의 노동자들은 파업 한번을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각오해야 하는지. 자신의 인생과 가족의 생계를, 그리고 심지어 목숨까지 파업의 제단 앞에 바쳐야 하는지. 헌법상 보장된 권리라는 것만을 믿고 부당한 근로조건과 정리해고에 맞서 파업을 선언하는 순간, 그들의 인생은 갈기갈기 찢기고 가족의 생계는 무너지는지. 결국 용역깡패와 공권력의 침탈, 그리고 돈의 압박 앞에 노동자들은 힘없이 스러지는지. 인간성이 파괴되는지, 가족이 해체되는지, 심지어 생명도 버리는지.

한진중공업에서, 쌍용자동차에서, 재능교육에서, 유성기업에서, 구미 케이이씨(KEC)에서, 경기도 포레시아에서. 얼마나 많은 증거를 제시해야 하는가.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죽어나가고 이 사회가 우울증에 걸려야 하는가. 대표적으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2009년 여름 정리해고에 맞서 77일간의 공장점거파업을 했고, 용역깡패 및 구사대, 공권력의 ‘파업진압’ 유혈참극으로 끝났다. 이 나라의 시민, 한 가족의 어버이, 성인 남자들이 파업을 했다는 이유로 전쟁터의 패잔병처럼 일렬로 묶여 끌려갔다. 파업의 대가다. 그리고 수십명이 감옥에 갔다. 여기까지는 허다히 벌어졌던 일이다. 파업을 하면 이 모양 이 꼴 난다. 근데,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그다음이다. 2009년 파업 진압 이후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하나씩 죽음을 택했다. 가족도 일부 동참했다. 그 가족에는 태어나지도 못한 아기도 있다. 그리하여 지난 4월까지 스물두명이 목숨을 잃었다.

파업의 결과다. 단지 정리해고만이라면 이렇게 많이 죽을 수는 없으리라 보기 때문이다. 정리해고를 단행하는 과정에서 회사의 비타협적인 태도, 국가의 일방적인 자본 편들기, 그리고 이 사회의 조용한 침묵. 그 가운데 공장에서 쫓겨난 노동자들은 길을 잃었다. 이 사회에서 갈 곳이 없다. 쌍용차 해고노동자라는 사실은 ‘블랙리스트’가 되어 그들의 재취업을 막았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존엄성 상실이다. 사회에서 배제된 자들, 일회용품처럼 버려지는 자들, 이 땅의 저주받은 자들. 바로 노동자들.

대통령의 말대로 한국이 “정말 어려운 계층은 파업도 못하는” 곳이라면, 그것은 바로 이런 조건 때문이다. 파업하면 인생 종치고 굶고 사회에서 배제될 각오를 해야 하는 것, 그것이 더 어려운 계층에겐 바로 죽음을 의미하기에 그들은 파업을 포기한다. 억울해도 포기한다. 그래서 한국은 파업권이 유명무실하다. 노동의 시민권이 없는 민주주의다. 그래서 이 땅이 “정말 어려운 계층은 파업도 못하”는 지경이라면, 민주주의 정체를 헌법상 버젓이 명시하고 있는 이 나라와 정치에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권영숙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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